아비로 산다는 것

  • 입력 2009.10.05 11:39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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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국가의 부름을 받은 아들놈을 군대에 데려다주기 위해 의정부 306보충대에 갔다 왔습니다. 친구들 아들은 벌써 제대를 했는데 이제야 입대를 하는 아들놈을 모시고(?) 먼 길을 간다는 일이 영 떨떠름했지만 마누라는 시간이 안 되고 자식 놈이 원하니 뿌리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군대 가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아들놈 삼촌이며 고모, 이모들이 차례로 며칠이나 들이닥쳐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군대도 안 가는 나도 한 일주일을 술 마시느라 초주검이 되고 말았지요.

입대하는 사람보다 배웅 나온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눈물바다 그 틈바구니에서 멋대가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사내 둘의 이별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간단명료하게 악수 한번으로 눈시울도 붉히지 않고 이별을 했지요. 아비 눈앞에서 고개 한번 돌려 뒤돌아 볼 줄을 모르고 묵묵히 걸어가는 아들놈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다가 코끝이 찡해져서 돌아오다가 30년도 넘는 어두운 기억의 한 끝을 문득 만져보았습니다.

1978년, 1월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영천에는 악다구니 같은 폭설이 엄청 쏟아지던 시절이었지요. 그때, 나는 스물한 살이었고 군대 가는 일이 죽으러 가는 것만큼이나 무서웠고 훈련소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탈영을 꿈꾸었고 박통의 장기집권에 단 한번도 분노를 하지 않았던 무지렁이였습니다.

시절이 하 수상하던 시절이라 그 당시까지만 해도 군대에 간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었으니 이별 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입대를 하던 날 우리 마을 분위기도 그야말로 장엄했습니다. 버스정류장까지 집안 어른들이 죄다 몰려나와 손을 잡고 또는 목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신신당부를 하던 장면은 대단한 신파였지요. 생각하면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징용과 남북전쟁의 원한의 강물이 그 분들 가슴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눈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빛바랜 흑백 풍경 속에서 러시아풍의 검고 길다란 외투를 걸친 아버지가 걸어 나옵니다. 입 안 가득 울음을 씹고 있는 집안 할매 아지매들의 등 뒤에서 걸어 나오신 아버지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는데, 나는 깜짝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아버지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돌아섰습니다.

“추운데 가다가 마셔라.”

안주도 없이 내 손에 쥐어진 금복주 달랑 한 병. 몸조심해서 잘 다녀오란 말도 없이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술을 권한 아비의 속내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러나 긴 세월이 걸려야 했습니다.

나는 곧잘 아들놈에게 술 마시기를 권유하고 아들놈도 걸핏하면 ‘아부지요, 소주 한 잔 할랑기요?’ 하고 말을 건네는 품위 없는(?) 시절을 살면서 단 한번 마주앉아 술잔을 나눠보지 못한 흑백풍경의 아버지는 아픔입니다. 술 잘 마시고 주정 잘 하고 가끔씩 폭력도 불사했던, 그러면서 아들에게는 통 말을 할 줄 몰랐던 아버지는 권위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참 못나게도 표현을 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속으로만 사랑했지 내색하는 데에는 천하의 자린고비였던 아버지가 내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돌아오는 차 속에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아마도 뒤돌아 볼 줄 몰랐던 아들놈 속에는 썰렁하기 짝이 없고 못난 이 아비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밥상머리 질서가 무너졌다는 비명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아비’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거대한 산이었고 건너지 못할 강이었지요. 아버지 말이 곧 법이었으니 대단한 권력이 아니었던가요. 우리는 꼼짝없이 숨죽이고 그 권력에 순종하면서 별로 이의 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는 위대했습니다. 땅강아지처럼 평생 흙만 파다가 나달나달 다 헤어진 누더기가 되어 좋은 세상 한번 보지도 못하고 북망산 하에 누워버린 아버지. 황금파도가 넘실거리는 가을 들판은 우리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위대한 유산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저 위대한 유산을 한꺼번에 홀랑 말아먹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나는 괜찮은 ‘아비’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니 영 자신이 안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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