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가 사라진 들판에서

  • 입력 2009.09.22 09:46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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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아래 경북 영주에는 ‘쥐뿔’이라는 통렬한 호를 쓰는 백발의 시인이 있습니다.

쥐뿔. 유식한 말로는 서각(犀角)인데 쥐뿔도 없다는 뜻으로 읽어도 좋고,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쥐뿔을 가진 특이한 사람쯤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호를 쥐뿔로 쓸 만큼 개성이 뚜렷한 권석창 시인.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인간성을 가졌으니 그의 시에도 부드러움과 넉넉함이 넘치는 풍자와 해학이 있습니다. 술 잘 마시고 욕 잘 하면서 버르장머리 없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시인의 풍자는 가히 절창이지요.

제가 오늘 이렇게 느닷없이 쥐뿔 시인을 호명한 까닭은 오후 두세 시간이나 들판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놀란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호강 북천에 낚싯대를 던져 놓고 목을 빼다가 기다림에 지쳐 무작정 거닐기 시작했는데 그곳이 벼가 누렇게 익어 가는 가을 들판이었습니다.

그런데 들판에는 허수아비 하나 보이질 않았어요. 나라의 파수꾼이던 허수아비가 사라진 들판이란 무엇입니까? 각설하고, 쌀 대란을 걱정하는 올 가을에 잠시 마음의 시름을 달래 줄 권석창 시인의 <허수아비뎐> 한 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공의 성은 허수요 이름은 아비다. 자는 등신이요 호는 바보다. 신라시대 처용이 먼 조상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확인할 바가 없고 나뭇가지와 지푸라기와 헌 옷가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출신이 극히 미천하여 아무나 하대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일찍이 당숙인 허당 선생께 배웠으나 가히 배운 바가 적었다. 가세가 빈궁하고 몰골이 남루하여 뭇사람이 벗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 나이가 차도 즐겨 혼인하려는 낭자 없어 매양 들판에서 혼자 놀았다.

허수아비는 원래 성정이 어질고 착해서 누가 흉을 보거나 벗해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았고 남을 미워할 줄을 몰랐다 철없는 아해들이 바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등신이라 하여도 오히려 그 재롱을 즐겨하였다. 다만 자신이 누구에게 무엇을 베풀거나 도움을 주지 못함을 매양 근심할 뿐이었다. 마침 해동 조선국은 쌀농사를 지어 밥을 해서 짠지와 곁들어 섭생을 도모하는 나라인지라 도처에 논밭이 즐비하였다.

조선국 백성들은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땀 흘려 가꾸어 가을에 결실할 무렵이 되면 참새가 달려들어 곡식을 축내니 근심으로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허수아비 하릴없이 들판을 거닐 때 자신을 보고 참새 떼가 황망히 달아나거늘 괴이히 여기더니 매양 그러한지라, 이는 하늘이 공에게 맡긴 천직이라 여기고 늘 들판에서 서서 미동치 아니하더라.

뭇 참새 떼가 허수아비를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백성들은 허수아비의 형상 여럿을 만들어 고을의 들판마다 세우니, 허수가 아비인지 아비가 허수인지 알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참새가 곡식을 축내는 일로 근심하는 바가 적었다. 더하여 허수아비의 공적을 칭송하는 소리가 나라 안에 자자하니 상이 아시고 허수공에게 벼슬을 내리려 하나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고 외로이 들판에 서서 식음도 전폐하고 참새 쫓기만 오로지 하니, 비바람에 입성은 남루하고 몰골은 날로 초췌하여 마침내 피골이 상접 한 바 되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같지 아니하나 백성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 더 많은 곡식을 거두기 위해 산을 깎아내고 바다를 막아 농사를 지으니 하늘이 노하여 들판에는 벌레가 끓고 병균이 창궐한지라. 이에 백성들은 농약이라는 요상한 약물을 만들어 곡식에 뿌리니 벌레와 균은 곡식을 범하지 못하였으나 참새마저 농약 묻은 낟알을 먹고 절명하니 그 광경이 참혹하기 그지없더라.

참새가 자취를 감추었으니 허수공 또한 들판을 지킬 명분이 없어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은바 되어 부지하허인 不知何許人)이라 그 종적을 아무도 알지 못하였더라. 공은 버림받은바 되어도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한다. 다만 훗날 소백산 아래 한 시인이 붓을 들어 그의 공을 기려 시를 지어 남겼을 뿐이었다.

〈지금은 그 이름도/잊혀가는,/남루한 입성으로/빈들에 서서/백성들 살림살이와 시국을 걱정하는/사내 하나 있었다 하네/식음도 전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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