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가을 풍경 하나

  • 입력 2009.09.14 12:02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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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가을 풍경 하나

어제는 오랜만에 관광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경남 양산엘 갔다 왔습니다. 살다보니 별 희한한 명칭의 데모도 있습니다. ‘경상도 농민대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뭔 생뚱맞은 소리냐고 이맛살을 구겼지만, 그 말을 몇 번 입안에서 궁굴려보았더니 그런대로 감칠맛이 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경상도 농민들이 모여서 잘못된 정부정책을 비판하며 대통령에게 호통을 치고 각성제를 좀 먹이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여름 내 복숭아밭에서만 박혀 사느라 들판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는데 영천을 출발해서 양산까지 가는 동안 내내 차창으로 펼쳐지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들판에서 이제 막 제 몸의 색깔을 바꾸어가는 나락을 보면서 문득 한 작가를 떠올렸습니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짧고 격렬하게 살다간 작가 백신애. 조혼의 폐단과 가부장제의 모순을 고발하느라 난무한 광기의 언어 때문에 작품성이 평가절하 되었던 작가. 하지만 백신애는 항일투사이면서 그 당시 민중의 처절했던 삶을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리얼리즘의 지평을 넓힌 사람이었습니다.

제법 고개를 숙인 이삭이 있는가하면 어떤 것들은 이제 막 이삭이 패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백신애의 수필「추성전문(秋聲前聞)」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가을이 오기 전에 가을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의 추성전문. 지금은 분명 가을입니다.

그러나 그 옛날 춥고 배고팠던 시절에는 나락이 누렇게 익어야만 비로소 가을이었지요. 우리들 유년 시절과도 맥이 닿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풍경 한 토막을 제 게으름을 핑계 삼아 여기에 소개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을을 맞는 농민들의 비장함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말입니다.

“우리 집 뜰은 즉 정원은 너무나 살풍경이고 무기교하게 적다. 그러나 가지에 매달린 능금(林檎)의 한쪽 뺨을 곱게 비춰주는 석양이 서산 저쪽으로 기울어가면 야원(野原)과 뜰을 경계하여 둔 집 주위의 철조망이 보이지 않게 되므로 멀리 보이는 저 산 밑까지 광야는 대규모의 광대한 정원으로 변하여진다.

집안 식구들은 이 광대한 정원에 흩어져 누워서 밤마다 은하수를 쳐다보고 가을 특히 추수하는 가을의 발자취를 들으려 한다. 누우면 은하수가 입술 위에 있게 되어야 이 해의 햇밥을 먹게 된다는 노인의 말을 나는 어릴 때부터 들어 잘 알고 있다.

춘하추동 어느 시절이고 가려 좋다고 생각하는 내가 아니면서도 여름이 절반이나 되어 오면 가을 오기를 재촉한다. 하루 세 홉이면 족하고 남음이 있을 밥이거늘 온 들을 덮은 황금파(黃金波)와 도향(稻香)을 사정없이 베어 눕히는 농부의 날랜 낫자루가 번쩍이는 가을이 무엇이 그리 반가우랴?

만산홍엽과 춘야만화(春野萬花)가 모두 그 운명이 시름없거니와 단주난연(丹朱爛然)한 가을의 굉장함은 더욱 사람들의 가슴에 조락(凋落)의 비가를 흘려보내나니 명랑함을 좋아하는 나에게 조락의 비가를 반가워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웬일일까, 밤이 되면 이 들 가운데 누워서 입으로 은하수를 겨누며 가을을 기다리며 좀처럼 입술 위로 옮겨오지 않는 은하수의 느린 걸음을 재촉하며 한탄하는가…….

뽀얗게 마를 흙 땀, 동리에 흰옷 떼들이 억센 보리밥에 시달린 창자로 얼마나 추수하는 가을을 기다리느냐.
봄과 함께 개방하였던 내 혼의 곡간(穀間)도 여름동안 흘린 땀과 함께 다 텅 비어졌으니 명상과 반성의 가을이 와서 내 혼의 곡간도 채워야 하겠다.

푸른 산기슭에서 한가히 우는 황소의 울음이 살찐 이삭을 가득 싣고자 재촉하노니 굶주린 흰옷의 무리를 위하여 텅 빈 내 혼의 곡간을 위하여 추수와 반성의 가을이여 어서 오소서……. 가을을 반기지 않는 병적인 나의 착각은 멸시 하소서.

가을의 유창한 소리가 들리는 시월이 앞으로도 몇 날이나 남아 있는 오늘, 반기지 않으면서도 기다리는 가을의 한 폭을 보았다.

가을이 오기도 전에 본 가을의 한 귀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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