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깍이 학생들의 ‘인생투쟁’

  • 입력 2007.09.15 15:11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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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

작은 산골마을 회관에서 흘러나오는 할머니들의 노래 소리다. 할머니들은 나눠준 종이에 있는 ‘반달’이란 동요의 가사를 더듬더듬 짚으며 잘도 따라 부르신다.

오늘은 내가 사는 옆에 면인 오산면 율천리 어르신들의 ‘문해교육’ 수업 날이다.

단어도 생소해하며 얼떨결에 시작한 ‘문해교육’이 겨울부터 봄, 여름을 넘겨 이제 가을까지 오게 되었다. 우리 늦깍이 학생들은 종이에 써있는 글씨는 무조건 모른다고 덮어놓더니 이젠 쉬운 동요 정도는 읽고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많이 늦었지만 서서히 자신의 삶의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서려 하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문해교육’은 문자이해, 문화이해, 문화해방을 긍극적 목표로 삼는다. 즉, 이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자 자아존중의 문제이고 따라서 인권이다.

요즘 같은 고학력 실업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시대에 비문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자체를 사람들은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우리가 사는 농촌에서는 그 수가 상당하다. 내가 수업하고 있는 이 마을도 전체 28가구중 14명이 수업에 참가하고 있다. 이곳만의 특수성은 아니리라 본다.

우리 어르신들이 살아온 시대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고 여성들에게는 더더욱 교육의 기회가 적었으며 농촌이라는 지역에선 어려서부터 농사일에 가족까지 챙겨야하는 고달픈 현실이었다. 때문에 최소한의 교육의 기회조차 이 어르신들에게는 누릴 수 없었다. 이는 60, 70대고령의 어르신들 뿐 아니라 간혹 50대의 젊은(?) 아짐들도 그렇다. 이 마을 늦깍이 학생중에도 50대 젊은 아짐 두분이 계시는데 그중 한 분은 마을 행사중 술기운을 빌어 못 배운 한을 내게 토해내기도 했다. 그동안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단다. 상당수의 우리 할머니 학생들은 못 배운 부끄러움에 공부한 가방을 집에서는 숨겨둔다 하신다.

하지만 수업하는 날이 되면 하루종일 농사일에 지쳐도 찬물에 밥 한술 떠먹고 머리에 검불도 떼지 않은 채 부리나케 마을회관으로 모이신다. 젊은 나도 하루농사에 지쳐 저녁이면 노곤히 누워 T.V보다 눈이 감길 때가 많은데 노인분들의 열정이 대단하다 싶다.


하지만 이들과의 수업이 그리 만만치는 않다. 금새 읽고 써봐도 물어보면 “몰러”. 오늘도 길임(76세)씨는 “공부를 하면 주워 챙겨지는 것도 있어야 한디 다 빠져나가부러” 하며 한탄이시다. 그리고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어느새 교실은 시장통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고치가(고추) 벌거지 땜시 다 빠져부네”, “지난 비에 퐅(팥)이 다 녹아져 부렸구먼”, “앞집 순창떡(댁)이 오늘 퇴원한다드만”.... 등등. 동네 소식들을 물어 나르는 사랑방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뿐이랴 한쪽에서는 “아이고 허리야 좀 누워야 쓰겄구만” 하며 영춘(78세)씨가 드러 눕는다.

정규학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교실풍경이다. 하지만 이런 황당하고 산만한 교실풍경을 굳이 애써 제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60, 70대인 이들에게는 이렇게 수업에 나오는 것 만으로도 큰일이고 이 작은 공동체를 함께 나누며 일구어 가는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대선을 앞두고 요즘 여성계에서는  여성농민의 법적지위 보장을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법적지위 보장은 고사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굉장히 부족하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교육기회일 수도 있는 이 공간에서 그들은 조금씩 변화하고 잇다. 이들의 삶의 모습이 투쟁이다 싶다.

이 척박한 땅에 엉겅퀴처럼 살아온 우리 늦깍이 학생들의 인생투쟁에 박수를 보낸다.
늦깍이학생 만세!!!

<전남 곡성군 옥과면 주산리 나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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