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여성들의 작은 변화

  • 입력 2009.05.18 08:26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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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오후, 여름처럼 뜨거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여린 뽕나무 잎 사이로 긴 바람이 흔들거리자 노랗고 뿌연 송화가루가 안개처럼 몰려다닌다. 여린 옥수수 모종 뿌리를 덮고 있는 검은 비닐멀칭한 밭두렁 위에다 노란 파스텔 그림을 그리며 또 바람이 지나간다.

그 밭둑 여기저기 아무도 돌보지 않는 뽕나무, 요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한 때 학생이 있는 집마다 봄, 가을로 누에를 쳤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이들은 뽕밭으로 달려가 날이 저물도록 저 뽕잎을 따서 이고 지고 어둠 내린 밤길을 더듬어 집으로 돌아와 누에를 치는 부모님 일손을 도왔다. 그 때 뽕나무는 아주 귀한 재산이었다.

나는 그 어린 뽕잎을 소중하게 바구니에 한 잎 한 잎 따 담는다. 오늘 도로 그 뽕나무가 귀한 나무가 되었다. 얼굴 있는 생산자와 마음을 알아주는 소비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텃밭’ 네 번째 꾸러미를 보내는 화요일이다.

“두부 2모, 유정란 10알, 도토리묵 1모, 타갠 옥수수쌀 500g, 표고버섯 220g, 뽕나물 95g, 밤나물 또는 곤드레 160g, 발효비지”

이것이 이번 꾸러미 상차림이다.

우리 주변에 흔한 풀포기, 나무 어린 싹들이 우리 밥상 위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를 버젓이 차지한 수입 식품, 가공 식품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소비자들의 밥상을 바꾸자! 우리 농촌과 농업을 소비자와 생산 농민이 함께 바꾸어 가자는데 마음을 함께 한 여성들의 의기투합이 바로 ‘우리텃밭’ 사업이다.

소박하지만 어린 시절 고향의 새소리, 물소리까지 담겨있는 정겨운 밥상. 일상화된 외식문화를 바꾸고 온 가족을 밥상으로 불러모으는 문화를 되찾아가자는 것이다.

어느 집이나 크건 작건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으로 포기마다 사랑을 먹고 자라는 텃밭이 있었다. 아침 저녁 낮은 울타리 너머로 채소를 키우시는 어머니를 확인하며 집을 드나들고 우린 자랐다.

그 때 그 어머니의 심정으로 지은 농사, 바로 그 어머니가 보내주신 남새며 들나물, 산나물을 받을 때의 가슴 찡한 감동! ‘주는 대로 먹겠다’는 소비자들의 귀한 마음에 내가 지은 농사에는 내 얼굴이 들어있다는 자부심이 직접 만나는 곳, 거기에 ‘우리텃밭’이 있다.

규모화, 신농법이 대세인 양 몰아대는 잘못된 농업정책 수십년 사이 우리 농사는 어느새 그 집을 대표하는 ‘주작목’이라는 이름으로 문패를 바꾸었다.

“자네는 무슨 농사를 짓나? ” “그거 심어서 돈되겠나?”

마치 잘 만하면 농사지어 큰 돈이라도 버는 것처럼, 농사를 바꾸면 성공하리라는 허상을 쫓게 하는 정부의 농업정책 뒤에서 결국 우리 농업은 점점 작아지고 농민들은 쪼그라들었다. 또 하나, 자식 키우듯 내가 심고 가꾼 농사지만 팔기만 하면 그만, 누가 먹든 상관없고 알지도 못하기에 겉모양만 좋으면 그만이다.

거기에 돈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빚으로 돌아와 고통으로 남는 농사! 이래서 농사가 재미가 없다. 

아직 농사지은 것이 없는 이른 봄이라 산과 들을 헤매며 꾸러미를 준비하고 있지만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하는 사실 하나, 나를 믿고 기다리는 꾸러미 회원들의 가족들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손 끝은 설렌다. 다음 주 꾸러미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을까... 은근히 설레는 맘으로 기다리는 내 형제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것이 꾸러미를 준비하는 나의 마음이다.

이제 6월부터는 직접 씨를 뿌리고 가꾸어 온 텃밭의 여러 가지 남새며 채소를 신문지에 싸서 보내고 그 자리에 또 다시 씨를 나누어 뿌리고...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이것이 비로소 농사 짓는 기쁨이고 보람이다.

점점 토종 씨앗을 늘리고 최소한 제초제로부터 시작해서 농약을 쫓아내고 토양을 바꾸고 나의 농사를 바꾸는 것, 즉 나의 삶을 바꾸고 우리 농업을 바꾸는 첫 걸음에 여성농민들이 발벗고 나선 이유다.

골짜기와 들녘을 헤매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이 되살아나고 나물 하나 발길 하나마다 추억이 걸려 나온다. 소박하지만 알뜰하고 행복했던 그 시절의 추억이 담긴 꾸러미들이 회원들의 마음속 고향을 되찾아 주는 효과도 뺄 수 없는 수익이다.

잠시 잊고 살아가는 작은 것, 낮은 것, 보잘 것 없는 것에 들어있는 소중함을 우리 아이들과 가족이 함께 나누는 밥상에 담는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나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생산자가 농민 된 자부심을 되찾아오고, 감사와 믿음으로 두 팔 가득 제철 꾸러미를 받아 안는 도시 소비자의 기쁨.

우리 삶의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한 텃밭사업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 험난한 세상 속에 작은 희망이 되고 씨앗이 되어 조금씩 더 좋은 세상으로 바꿔 가는 꿈을 꾸는 야무진 여성들의 작은 발걸음이고 시작이다.

<선애진 강원도 홍천군 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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