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기억의 저편

  • 입력 2009.05.04 17:30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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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넘도록 신문도 텔레비전 뉴스도 보지 않았다. 휴대전화는 서재에 던져두고 이따금씩 확인만 해볼 뿐 전화도 받지 않았다. 해거름만 되면 어김없이 마을의 누군가와 술을 마셨고 저녁 여덟 시쯤 취해서 잠이 들었다. 무슨 뚜렷한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느닷없이 세상과의 소통이 싫어졌다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그래서 매일 외진 산속의 삼밭골 ‘주막’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날마다 어김없이 새벽 두세 시에 눈이 떠졌고 그때마다 부엌에 나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으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는데 그것이 버릇이 되고 말았다. 봄 이후 시인이며 작가들이 보내준 책들을 바쁜 핑계로 읽지도 않고 쌓아둔 것을 요즘에 와서야 여러 권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용석이와 삼밭골 주막으로 들어서는데 여느 날과 달리 술청이 떠들썩하다. 주막 아래 저수지에서 세월을 낚던 강태공들이다. 이들은 놀고먹어도 인생에 하자가 없는 부류인지, 직장을 잃어버린 부류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저수지에는 날마다 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우리의 아지트를 점령하고 있는 경우는 없었다. 우리는 구석자리에 앉아 소주를 홀짝거리며 그들이 핏대를 세워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누구는 백만 원 하나로 감방에 가는데 그라믄 되나. 노무현은 오늘 구속되어야 해.”

 그리고 보니 오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하는 날이다.  

 “아이고 행님요, 노통이 구속되면 행님 인생에 덕 될 일이 머 있는기요?”

 “이 사람아, 니는 택도 없이 자꾸 노무현 편을 드는데 그 많은 돈 받아먹은 죄 값은 해야지. 오년 내내 나라만 절단 내놓고 지 혼자 깨끗한 척 하디 이게 머고? 개 코다.”

 “행님요, 절단은 중놈 나뭇단이 절단이고 인자는 전직 대통령을 구속해가는 안 되니더.”

 나는 영남 무림의 어중이떠중이검객들이 휘두르는 전혀 예리하지 못한 칼날을 바라보며 묘하게 입술을 비튼다. 오십대 후반쯤이나 육십 줄에 들어 보이는 수구보수꼴통 다섯 명을 상대로 노무현을 위한 변명을 늘어놓는 그중 젊은 사람도 노사모류는 아니다.

 “니도 그때 노무현 찍었제? 나는 이회창 찍었다. 그런데 시끄러워 못 살겠다. 그 죄로 니가 저 사람들 책임지고 정리 좀 해라.”

 용석이가 신경질적으로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죄 없는 내게 눈을 흘겼다. 나는 눈을 감고 그때 그 시절을 더듬어본다. 그때, 나는 투표권이 없었다. 대선 몇 해 전에 영천농민회가 하루 종일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 점거했다는 이유로 회장이었던 나는 집행유예 기간이었다.

집행유예 기간에는 투표권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만약 내가 투표권이 있었다면 누구를 선택했을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진보정당 후보와 노무현 사이에서 많이 고민은 했을 것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해가 설핏 기울어질 무렵에야 영남 무림의 어중이떠중이 검객들이 몰려나가자 술청에는 갑자기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용석이는 술맛을 잃어버렸는지 계속해서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주막집 계집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물고 방안으로 들어가다가 어미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뒤집어쓴다. 그래도 얼굴에는 해맑은 웃음이 걸려 있다.

 노무현은 내게 어두운 기억의 저편이다. 인간들에게 밝은 기억은 어두운 기억에 묻혀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 밝은 기억들은 뒷날 사가들에 의해 정리가 되겠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대번에 생각나는 것들이 이런 것이다.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을 한 사람. 신자유주의를 신봉한 대통령. 수구보수꼴통에게 대연정을 제안한 이상한 정치인.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버린 ‘덜컥수’의 달인. 연민의 정마저 구겨서 던져버리도록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못난 양반.

그렇지만 나는 영남 무림 검객들의 삿된 칼질에는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그래서 노무현에 대해 ‘보복수사’라는 말이 나오고 나도 그 말에 슬며시 마음이 기울어지기도 한다. 영남 무림은 증오로 가득 차있다. 내공이 얕은 하수들이 무림을 제패해서 이 땅 서민들의 삶을 도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가 이번 선거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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