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도 부자들은 비켜간다

  • 입력 2009.04.27 13:17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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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하기 싫으면 핑계거리도 많다. 오늘은 순전히 바람 탓이었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일하다가 말고 춘만이 형과 용석이 차를 타고 시내 보신탕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바람은 미친 듯이 불었다. 뉴스에는 초속 10미터라고 했는데 몸으로 느끼는 바람의 세기는 그것 이상이었다.

아직 복숭아 씨솎기는 일러 가지 끝부분만 손질을 하고 있는데 용석이가 참이나 먹으러 가자는 말에 반갑다고 따라나선 것이다. 개고기 수육을 시켜 소주를 두 병 비웠을 때, 동철이 형이 전화를 걸어왔다.

“밭에 있으니까 속에 천불이 나서 도망 왔다. 한잔 더 부어라.” 동철이 형은 들어 오자말자 안주도 없이 연거푸 세 잔을 비우고는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와? 제수씨가 바가지 긁을 사람은 아이고 무슨 일인데 그카노? 안주나 좀 집어라”

춘만이 형이 동철이 형 소주잔에 물을 따르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술맛이 좋으나? 니는 밭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리고 이래 앉었나? 팔자 좋다.”
“아 씨× 답답어 죽겠다. 무신 일인데?”

성질 괴팍한 춘만이 형이 버럭 성을 내고 능글능글한 동철이 형은 소주잔 속의 물을 재떨이에 부어버리고 자작을 한다. 창문 밖 목련나무 가지에 바람 감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흡사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 같다. 대여섯 잔을 비우고서야 동철이 형이 벽에 등을 기대었다.

“오늘 마 한 백만 원 날려뿌렀다, 아이고 속 따갑어라.” “와, 차 박었나? 언제?”
“지랄한다. 니도 한 백만 원은 좋게 날렸는데 무슨 영문인지 아이따나 모리제?”
그제서야 무슨 말인지를 알아차린 춘만이 형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가 주저앉으며 식탁에 이마를 묻었다. 아주 게으르게 술을 마시던 용석이가 입가에 능글능글한 웃음을 잔뜩 흘리며 양말을 벗어 구석으로 던져버린다. 저 행동은 이제부터 시작한다는 신호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백만 원을 날려버린 두 사람 앞에서 용석이는 신명이 났다.

“아이고, 나는 백만 원도 훨씬 더 벌었네. 형님들 보소, 부지런해서 좋은 것도 아이구마.”
“이래 있을 때가 아이다. 고만 마시고 퍼뜩 가자. 아이고, 미치겠네.”
“춘만아, 보면 속 터진다. 눈 딱 감고 고마 술이나 마셔라. 가봐야 할 일도 없다.”
춘만이 형은 조급증에 시달리며 앉지도 서지도 못한 자세로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내가 용석이 옆구리를 찔러 구석에 던져 놓은 양말을 집어다 주었다. 그러나 용석이와 동철이 형은 수육 접시바닥을 깨끗이 비운 후에야 구시렁거리며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차가 시내를 벗어나 포도밭 지대로 접어들자 용석이는 경적을 울리며 좋다고 감탄을 늘어 놓았다. 그때마다 춘만이 형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포도밭 풍경은 가히 절경이었다. 바람에 산산이 찢어진 비가림 비닐이 수백만 평의 밭에서 만국기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저게 모두 돈이다. 부도난 수표 쪼가리가 허공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아니다. 갈갈이 찢어진 농사꾼들의 마음이, 한탄이, 울화가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밭 들머리에 춘만이 형을 내려주고 용석이는 차를 몰아 들판 곳곳을 살피고 다녔다. 성한 밭은 별로 없었다. 돈을 많이 들여 쇠파이프에 클립을 끼운 것은 대체로 성한 편이었고 철사에 빨래집게로 고정한 곳은 모조리 초토화 되어버렸다.

어떤 곳은 바람을 견디지 못한 철근 막대가 삐딱하게 무너져 있고, 어떤 곳에는 찢어진 비닐이 이제 막 올라온 포도 새순을 휘감아 엉망으로 뜯어 놓기도 했다. 나는 폐허로 변한 포도밭에 나와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농사꾼들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중기야, 저게 현실이다. 박주환, 정병도, 경채 이런 사람들 밭은 멀쩡하잖아. 씨팔, 바람도 돈 많은 사람들은 못 건드리는 모양이다. 저것 봐라. 부자들만 멀쩡하다 아이가?”

게으른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춘만이 형을 약 올리던 때와는 달리 용석이 표정은 많이 굳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백 평 포도밭을 비가림 하는데 드는 비용이 0.7밀리미터 비닐 값이 삼십만 원이나 든다고 한다. 이천사백 평 포도농사를 짓는 동철이 형은 이 가문에 백이십만 원을 날렸다. 바람 덕에 비닐공장만 살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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