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조폭이었다

  • 입력 2009.04.20 08:44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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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잘 자고 일어나니 내 몸은 바닷가에 와 있다. 문득 막막해진다. 나는 티끌처럼, 갯바위에 멍하니 앉아 있다. 허공에 걸어 놓은 빨랫줄처럼 수평선은 팽팽하다.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손끝으로 툭, 튕기면 쨍, 하고 금이 갈 것 같은 물의 빨랫줄을 나는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수평선 밖에서 돌아오는 배도, 수평선 밖으로 가는 배 한 척 보이지 않는다. 먼 바다에서 달려온 파도가 발부리에서 흰 포말을 만들며 깨어져 흩어진다. 수평선을 정면 응시한 내 머리는 하얗게 비워져 어떤 생각 한 오라기도 하지 못한다.

이따금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가 내 존재를 확인시켜 줄 뿐 깊은 적막이 첩첩 깔리고 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케이와 엘의 등 뒤에서 햇빛이 바람에 잘게 잘게 흩어진다. 막 취기에서 빠져나오는 내 몸이 싸늘하게 식는다.

여러 날의 씨름 끝에 간신히 복숭아밭에 물 대는 일을 마치고 아침부터 텃밭으로 얻어 놓은 집 앞 묵정밭을 손질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케이와 엘이 들이닥쳤다. 별장 삼아 빈 집을 사 놓고 여름날 친구들을 이끌고 와서 삼겹살이나 구워먹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주인은 작년에 사백 평 밭에 감나무며 매실나무를 심어 놓고 손을 대지 않아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에 들른 그는 아내가 허리디스크 수술을 해서 올해는 올 수가 없다며 어머니에게 밭을 부탁했고, 채소며 잡곡 심을 땅 한 평 없는 처지에 늘 혀를 차던 어머니는 덜렁 허락해 놓고는 며칠째 나를 볶아대고 있었다.

“행님, 전화는 와 안 받는기요. 마 치우고 콧구멍에 바람이나 좀 넣으러 가시더.”

마른 잡초더미에 불을 지르고 있는데 케이가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살살 흘리며 유혹을 한다.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는데 엘이 또 추파를 던진다. 바다낚시는 아침에 느닷없이 엘이 제안을 하고 케이가 동의하면서 만만한 나를 들러리 세우려고 들이닥친 것이었다. 농사경력이 일 년짜리 엘은 바다에 가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징징거린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나는 서둘러 불을 꺼버리고 따라나섰다.

아침을 바닷가에 와서 컵라면으로 때운 나는 케이와 엘이 고기를 잡으면 회나 뜰 생각으로 낚시를 포기하고 기다렸지만 둘은 내내 허송세월만 낚고 있었다.

“안 되겠심더, 미역이라도 따다가 소주 한잔 합시더.”

몇 시간째 고기 한 마리 건져 올리지 못한 것이 미안했던지 엘이 그렇게 말하고 나왔다. 벌써부터 술이 고팠던 나는 갯바위에서 미역을 따다가 안주 삼아 먹었더니 뜻밖에도 그 맛이 대단하다. 시장에서 파는 물미역보다 부드럽고 향이 좋아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엘이 가서 훨씬 더 많은 미역을 따오자 케이도 합류를 한다. 소주 몇 잔을 비운 뒤 케이가 칼을 들고 가더니 제법 많은 따개비와 홍합을 따 와서 삶는다. 그 맛도 제법 괜찮다. 연신 따개비 속살을 발겨 먹으면서도 내 입은 군소리를 한다.

“낚시 와서 이게 무신 짓이고?”
둘이 다시 낚싯대를 잡자 나는 그 자리에 드러누웠고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잠 속에서 수상한 세월의 조폭들을 만난 것 같다. 노무현 비리의 조폭들이, 북한이 쏘아올린 것이 로켓이니 인공위성이니 떠드는 국제조폭들이, 국내정치 조폭들이 끊임없이 내 몸을 바다 속으로 밀어 넣은 것 같은 기억이 아득하게 만져진다.

케이가 제법 큰 복어 한 마리를 건져 올렸다. 뱃속에다 빵빵하게 공기를 집어넣고 긴장하는 놈을 손바닥에 놓고 망설이는데 포항에서 왔다는 사람이 와서는 대번에 껍질을 벗기더니 간단하게 손질을 해버린다. 잘게 썰어 한 일곱 점, 그 중에서 나는 석 점을 먹었다. 맛은 기똥차게 좋다. 해는 서쪽으로 엄청 기울었고 고기는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손맛 한번 보지 못한 엘은 그래도 소원을 풀어서 원이 없다고 한다.

짐을 꾸린 우리는 횟집으로 가서 멍게와 해삼 안주로 술이 취했고 케이가 일방적으로 집단 외박을 선언했다. 엘은 해산이 임박해 있는 아내에게 전화로 외박 결재를 받았지만 나는 결재 신청도 하지 않았다. 셋은 노래방에 가서 악다구니를 질렀고 나는 또 잠을 잤다. 누구처럼 결재도 없이 바깥잠을 잤다. 그날, 나는 아내에게 조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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