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 대한 어떤 이야기

  • 입력 2009.04.13 08:44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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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이 만개를 한 풍경은 절경이다. 좋다! 절창이다. 만사 다 팽개쳐버리고 저 복사꽃 그늘 아래 여럿이 한 자리 깔고 앉아 막걸리 몇 말 받아다 놓고 종일 흠뻑 취했으면 좋겠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이겠다.

연일 25도를 넘나드는 초여름 더위를 그렇게 보낼 수만 있다면 그만한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라도 좋겠다 싶은데 마음뿐이다. 눈만 뜨면 물 때문에 난리법석이다. 강바닥은 졸은 냄비바닥처럼 살풍경하고 봇물도 함부로 퍼낼 수 없도록 감시의 눈초리가 삼엄하다.

생각 탓인지 복사꽃 모양새도 목이 말라 어째 잔뜩 찡그린 표정이다. 봇도감은 아침부터 불평과 불만을 접수하다보니 점심때가 되기도 전에 술에 취해버렸다. 이 가뭄도 다 남의 동네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포도밭에 물을 대면서부터 우리 마을도 심각해졌다. 

 “씨X, 물도 못 푸는데 술이나 푸러 가자.”

포도밭에 분수호수를 새것으로 깔아 놓고 기다리다 지친 용석이가 내 옆구리를 툭 친다. 장택백봉 밭에 사흘째 경운기를 세워 놓았지만 봇도랑에 물은 내려오지 않는다. 메기 침처럼 조금씩 흐르는 물을 상구에서 다 끌어가고 하구는 그저 마른하늘만 쳐다본다. 밭이 타는 것보다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가뭄을 견디는 것은 포도나 복숭아나무가 아니라 사람이다 보니 더러 여기저기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오십대 전반 넷이 삼밭골로 몰려갔다. 무인지경의 삼밭골 못 위에는 몇 해 전에 식당이 하나 생겼고 마을에서 불과 오 리 정도인 그곳으로 동네 사람들은 걸핏하면 새참 먹는 장소로 자주 이용하고 있는 터였다. 거기다가 주인이 이혼을 하고 혼자 사는 젊은 여자라 마을의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우야겠노, 이 가뭄에 몸이라도 잘 간수해야지 마이 묵어라.”
 미리 옻닭백숙을 주문해 놓은 용석이는 뒷다리 하나를 내 앞 접시에 건져 올려놓는다. 날씨 탓인지 사이다를 섞은 막걸리는 맛이 썩 괜찮다. 그러나 닭고기는 질기고 옻을 넣은 국물이 목구멍에 착착 감긴다.

 “요새 가뭄이야 이거는 가뭄도 아이다. 느그 성배 외할매 이야기 들어봤나? 옛날에 귀호댁 친정 모친이 일찍 남편을 잃고 다섯 남매를 키웠는데, 농사가 다 하구에만 있었단다. 논바닥이 조금만 마른다 싶으면 오밤중에 상구로 올라갔단다.”

 막걸 리가 몇 순배 돌자 경철이 형이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묻으며 담배를 꺼내 물다말고 이야기를 꺼냈다. 귀호댁이라면 이 마을에서 몇 안 되는 타성바지 중 한 사람인데 일 원도 재물이고, 망개도 과실로 여길 만큼 돈 안 쓰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남편 없이 농사를 짓다보니 특히 가뭄이 들면 남자들에게 괄세를 많이 받았는데, 상구로 올라가서 수멍이란 수멍은 다 틀어막고 길목 어디쯤 도랑에 발가벗고 들어가서 밤새도록 목욕을 했단다. 사람 기척이 있으면 어 시원타, 어 시원타 하면서 일어서서 물을 좍좍 끼얹었단다. 하구 자기 논에 물이 다 들어갔을 시간이 되면 그때사 목욕을 마쳤다카이 참 얼매나 독종이고.”

 “그카다가 남자들에게 당하지는 안 했다 카든기요?”

“그거사 나도 모르는 일이제. 오십 년도 더 전에 일이라는데.”

 “그 참 괜찮은 방법이네. 그 가뭄에 과부가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물 댈라카믄 얼매나 버겁었겠노. 아싸리 홀라당 벗고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달밤에 남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얼매나 식겁을 했겠노. 아닌 밤중에 귀신도 그런 귀신이 어디 있었겠노, 그쟈?”

 귀호댁 친정어머니가 아닌 나는 그런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 또 역사학자 김성칠의 6.25 일기를 묶은『역사 앞에서』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보니 그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는 곳곳마다 전해오는 모양이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농민이었던 시절, 쌀농사에 목숨을 걸던 시절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경철이 형 이야기는 사람들의 귀에 솔깃하게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먼 나라 이야기쯤으로만 듣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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