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궁전의 농사(2)

  • 입력 2009.04.06 08:40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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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올라가는 길의 경사면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자칫하면 차가 뒤로 벌렁 자빠질 것만 같을 만큼의 벼랑길이다. 가라골. 해발 사백 미터에 육박하는 산중턱의 마을. 이 마을의 토지라곤 오륙천 평에 불과한 동네 어귀 비탈밭이 전부다. 마을 동편으로는 적색의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고 뒤로는 활엽수림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담벼락에 달린 호박이 떨어진다면 그대로 굴러 계곡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다.

“어이 아재, 당신이 여기에다 태를 안 묻었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그쟈?”

마을 맨 첫째 집 앞 공터에 차를 세운 친구가 그렇게 이죽거렸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돌아보니 친구는 찌글찌글 웃으며 덧붙인다.

“당신이나 내나 이 절벽에 살다가는 한 달도 못 살고 헛발 딛고 비명횡사 한다구. 헌구헌 날 술 마시고 삐딱 걸음을 걷는 처지에 이 마을에서 온전하게 살겠나?”

마을은 온통 폐가다. 돌담은 무너지고 추녀도 기울어 아슬아슬하다. 이따금 사람이 살고 있는 집도 그 형용은 도깨비처럼 음산해 보인다. 폐가 마당마다 도깨비바늘이 와욱한데 문짝이 떨어져 나뒹구는 흑백의 거친 폐허는 차라리 아름답다.

나는 쓰러져 가는 마을의 풍경을 무슨 유적지처럼 내려다보며 이십 년 저쪽에서 며칠을 묵었던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그러나 기억은 잘 만져지지 않는다. 서른한 살의 내가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왔을 때, 우연히 만난 친구 하나가 이 동네에 산다고 해서 들렀다가 며칠을 묵은 적이 있었다.

“참 기가 막히는구나. 이 산비탈에 살던 사람들 도시에 나가 다들 잘 살고 있는지 모리겠다. 그 사람들 고향이 이렇게 참담한 줄은 알랑가. 나 퇴직하면 여기다 산방 하나 짓고 글이나 쓰며 살란다. 여기 살면 세상이 안 보일 것 같구나.”

친구는 작년, 쉰 살을 훌쩍 넘긴 나이에 시인 나부랭이가 되었다고 티를 내는 말이다. 고샅길에서 만난 허리 굽은 노파에게 친구가 집을 하나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대답은 뜻밖이었다. 평당 십오 만 원이란 말이 거침없이 나왔고 그것도 내놓기가 바쁘다는 것이었다.

이 빌어먹을 벼랑에도 부동산바람은 어김없이 휩쓸고 갔다고 하니 지구상에서 부동산바람이 폐망할 나라는 이 나라밖에 없을 것 같다.

“워낭소리 주인공이 여기도 있구나. 농사꾼 아재도 저 훌치질은 못 배웠제?”

마을 초입으로 내려오는 길에 노인이 소를 몰아 쟁기질 하는 모습을 보고 발길을 멈춘 친구가 말했다. 경사 이십 도가 훨씬 넘어 경운기 트랙터가 감히 발을 붙이지 못할 비탈을 평생 소 몰아 쟁기로 일구어 온 노인이 성자처럼 보였다.

친구는 차에서 물병을 들고 가서 잠시 소를 세우고 숨을 고르는 노인에게 무어라고 말을 건넸다. 노인은 소고삐를 쟁기에 묶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고 나는 어슬렁어슬렁 그쪽으로 걸어갔다.
노인은 쟁기질을 하는 밭의 제일 위쪽인 그곳에 감자와 고추를 심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인진쑥을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밭에는 지난 가을에 베어낸 인진쑥 그루터기가 온 밭에 깔려 있었다. 안 그래도 이 마을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사나 궁금했는데 주 수입원이 인진쑥이라고 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에는 이십 여 호가 다 약초 캐서 묵고 살었지. 인자는 다 떠나고 너댓 집이 사는데 내사 새파랗게 젊은 축이고 다들 죽을 날만 기다리지.”

나는 문득 이 마을이 하늘궁전 같고 저 노인의 쟁기질이 하늘궁전의 농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세상에 이토록 남루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마지막 유목민 세대인 저 나이가 아니라면 불가능 할 것이다. 저 불편한 남루를 견디면서 즐길 줄 아는 노인은 분명 우리 아버지 세대였다.

나는 친구와 노인이 껄껄 웃으며 격의 없는 사이가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넘어진 쟁기를 바로 세워 소를 몰아나갔다. 이랴, 워디, 워디. 옛날 젊은 아버지가 배워서 버리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하시면서 기어이 내게 쟁기질을 가르치셨다. 잘 길들여진 늙은 소는 유순하게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쟁기질은 소가 힘들지 않게 보습이 적당한 깊이를 유지하도록 중심만 유지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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