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기에 시동을 걸어 놓고...

  • 입력 2007.09.01 21:09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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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탁 충북 충주시 산척면
논가에 세워놓은 경운기에 시동을 걸어놓고 담배를 한 대 빼문다.

물 장화에 우비에 수영할 때 쓰는 고글까지 썼으니 완전무장을 끝냈다. 담배를 끄고 마스크를 한 다음 소독대를 잡는다.

백여 미터 남짓 되는 논이 길게만 보인다. 아내는 경운기에서 내뿜는 배기가스를 마시며 줄을 풀고 나는 일 미터 정도의 소독대를 총처럼 붙잡고 논으로 뛰어든다.

순식간에 독한 농약 냄새가 전장의 포연처럼 퍼져나간다. 아무리 마스크를 했어도, 잎짚무늬마름병과 혹명나방과 멸구와 도열병을 한꺼번에 무찌르려는 독한 농약은 사정없이 내 코로 파고 든다.

허리까지 올라와서 벌써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나락들이 희멀건 농약을 뒤집어쓰고 나는 그 농약으로 온몸을 적시며 앞으로 진격한다.

갑자기, 나는 누군가에게 조롱받는 광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마치 외줄을 타듯 벼 포기 사이의 좁은 골을 똑바로 걸어야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중심을 잃고 발을 헛디디면 벼 포기를 밟게 되므로 나는 소독대의 반동과 앞을 막는 빽빽한 벼 포기를 뚫고 최대한 똑바로 줄을 탄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내가 보여주려는 묘기라도 되는 것처럼 소독대를 기관총 삼아 멀리까지 골고루 퍼지도록 농약을 난사하는 것이다.

오십 미터도 가기 전에 마치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줄이 따라오지 않는다. 볏잎에는 미세한 털 같은 게 있어서 어디든 잘 들러붙는다.

아주 작은 힘이지만 수십, 수백만의 잎들이 소독줄을 붙잡고 늘어지면 도무지 딸려 오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 줄이 물위에 얹히도록 하지만, 그것도 하다보면 그리 쉬운 것만도 아니다.

지금부터 악전고투의 시작이다. 오른손으로 소독대를 잡고, 왼손으론 줄을 감아쥐어 어깨에 건다. 힘을 더 주기 위해 어깨를 잔뜩 구부리고 한 걸음씩 전진하며 농약을 뿌리다보면 온몸은 땀과 농약으로 범벅이 되고 쓰고 있던 고글에는 하얗게 수증기가 맺힌다.

얼른 벗어서 주머니에 넣으면 맺혔던 땀방울이 눈으로 들어오지만, 도무지 닦을 길이 없다. 손에 낀 장갑에선 농약이 뚝뚝 떨어지고 우비 역시 마찬가지다. 소금기에 쓰린 눈알을 몇 번 껌뻑이며 다시 전진이다.

이제 십여 미터가 남았다. 줄은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처럼 뒷발을 버티며 끌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끌어오지 못하면 내가 죽을 판이니, 나는 나대로 온힘을 짜내어 용을 쓴다. 줄이 끊어질 것 같다.

설핏 중심을 잃고 한 발로 옆을 디디고 만다. 몇 포기의 벼가 발에 밟혀 쓰러지지만, 지금으로선 일으켜 세울 수도 없다. 골인을 앞둔 마라톤 선수처럼 숨을 몰아쉬며 안간힘을 쓰노라면 늘어난 폐활량만큼 고운 농약입자들이 속속 폐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햇빛은 형벌처럼 내리쬐고 탈수된 몸속에선 환청처럼 예전에 읽었던 시의 구절이 울린다. 아아, 이러다가는 오래 못가지. 정말 오래 못가지.

반환점을 돌았다. 나는 한결 수월하지만, 지금부터는 줄을 잡아당겨야 하는 아내의 고통이 시작된다. 몸피가 나의 반밖에 안 되는 아내는 그야말로 뱃구레가 들먹거릴 만큼의 안간힘으로 조금씩 줄을 당길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내가 움직이는 속도에 맞추어야 한다. 너무 빨리 당기면 나와 줄다리기를 하는 게 되고 너무 느리면 줄이 벼 포기에 감겨 버린다.

13년째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농사를 짓겠다는 남편을 따라와 이제 남은 것은 나날이 늘어가는 마이너스 통장과 깊어진 주름살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희망 없이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것.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땀에 젖은 아내의 얼굴은 붉게 익었다. 내 얼굴 역시 그럴 것이다. 처음과 다름없이 생생한 것은 무심하게 돌아가는 경운기뿐이다. 나는 다시 논으로 뛰어든다. 똑같은 과정을 한 번 더 되풀이해야 닷 마지기 논배미를 평정하게 된다.

나는 전사의 용기를 내어 논으로 들어가면서, 싸워야 할 나의 적들이 과연 혹명나방과 벼멸구들인지, 아니면 농약총을 쏘아댈 그 누가 또 있지나 않은지 마악 헷갈리기 시작했다.

 

최용탁<충북 충주시 산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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