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회의 역동성을 보다

  • 입력 2009.02.16 06:47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저께 밤에는 경주 아화 어디 두메산골에서 영천농민회 간부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어슬렁거리며 거기에 좀 늦게 합류를 했다가 새벽 두 시쯤에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차 옆구리에 끼어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구들목에 지친 등을 눕혔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오래 뒤척거렸습니다.

올해는 어쩌다가 정나미 떨어지는 ‘감사’ 직책을 짊어진 터라, ‘젊은 사람들 분위기 깬다’며 가지마라는 누군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현장 감사’를 한다는 핑계로 거기 갔다가 가슴이 너무 울렁거려서 여간 혼이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농민회 현장에서 떠나 있다가 야전사 천막으로 돌아왔다는 다분히 문학적인 감상에 젖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콧날이 시큰했던 건, 근간의 농민회가 어딘가 맥이 빠져 흐느적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오래, 강하게 받고 있었는데 그저께 밤에는 모처럼 농민회의 역동성을 보았던 까닭입니다. 그것이 참 반갑고, 고맙고, 그래서 제 감상의 한 끝자락을 슬쩍 건드렸던 거지요. 가마솥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물결의 역동성을 보았습니다.

들끓는 그 물결을 바라보면서 농민회의 날것의 야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운했던 점은 이 사람들이 겨우 나이 몇 살 더 많은 것 때문에 저를 늙은이(?) 대하듯 극진해서 화가 나기도 했고요.

외부 강사를 배제하고 내부에서 강사를 구한 것은 차라리 감동이었습니다. 서울에 살다가 작년 봄에 농사지으러 내려온 영수의 국제정세와 한반도 정세, 우리 농업/농촌/농민문제와 그 대안을 들려준 강의야 굳이 무어라고 말할 계제가 못 되는 것이라 그만 두고, 두 번째 강의를 맡은 종국이 얘기를 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개그맨이 마이크를 잡고 아주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고 칩시다. 그게 좀 웃기잖아요? 걔가 아무리 진지해도 꾸역꾸역 터져 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영천농민회 김종국이가 그렇습니다.

종국이는 오랫동안 영천농민회 막내로 살아서 버르장머리가 좀 없는 녀석이었는데, 아무 자리에서나 걸핏하면 ‘농담 따먹기’를 잘 하고 침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도무지 못 참아하는, 인간관계에서 ‘경계’가 거의 없는 친구입니다.

제가 만약 “니는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노?” 라고 물어보면 녀석은 눈도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앉아서 생각하는 데요”라고 말해버려 사람을 참 머쓱하게 만드는 맹랑함도 겸비하고 있습니다.

종국이의 강연 주제는 ‘농민회란 무엇인가?’ 이었습니다. 전농의 이 고전적인 강의 주제가 공자왈 맹자왈 처럼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내용입니까. 지금이 어느 때라고 농민회가 무엇이고, 농민회원의 품성과 자세 따위를 들먹거려야 합니까.

하지만 영천농민회는 이 고전적인 주제를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어야 하는 지경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칠팔 년이 지나도록 신입회원 교육 한번 없었고 중간간부 양성에도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조직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양이 좀 그랬습니다. 그 동안에 신입회원은 많이 늘었고 그 사람들이 중간간부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강의는 상당히 감동적이었다고 신입회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조직운영의 적절한 비유와 사례가 그런대로 돋보였습니다. 처음에 저는 종국이가 마이크를 들자 갑자기 진지해진 개그맨을 보는 것 같이 어색해 보이고 제 낯이 뜨거워져 몇 번이나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워 물곤 했지요.

그러나 열 받은 발동기 신나게 돌아가듯 종국이 강의는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저도 거기에 몰입을 했습니다. 드문드문 내뱉곤 하던 육두문자와 제 이야기에 자신이 몰입해버린 것 같은 묘한 분위기만 빼면 생애 첫 강연치고는 훌륭했습니다.

요즘 종국이는 물 만난 고기 같이 싱싱해져 있습니다. 아니, 발랄해졌습니다. 사실 ‘악동의 발랄한 표정’은 종국이의 상징이었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종국이는 엽록소가 빠져나가버린 풀잎처럼 시든 표정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 한 구석이 짠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눈 밑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걷히고 발랄함을 되찾아 ‘악동’의 표정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악동의 발랄한 표정이 농민회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힘이 될 것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