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농민을 기다리는 마음

  • 입력 2009.02.09 08:07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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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오랜만입니다. 요즘도 농민회는 열심히 하는기요?”

참 오랜만에 인철이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잠시 할 말을 잊고 머뭇거렸다. 김인철. 우리 앞집에 살던 거문도 출신 인철이를 나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안부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5년 전인가, 도저히 농사를 지어서는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고 가진 땅 2천4백평을 처분하고 창원으로 떠난 그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순간적으로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야, 오랜만이다. 언제 영천 한번 안 오나? 와서 소주나 한잔 하자.”

“좋지요! 형님이 창원 하번 오소. 여기 안주가 영천 안주보다는 훨씬 좋구마. 한번 오소.”

술하고 무슨 철천지원수가 졌다고 5년만의 첫인사가 소주 한잔이다. 그게 술 좋아는 사내들 인사법이니 또 어쩌랴. 그와 내가 십여 년 마누라 눈치 살피며 비워낸 술병은 상상도 하지 못할 숫자이리라.

인철이는 부산에서 대학을 마치고 결혼 후 장모님 땅이 있는 우리 집 앞으로 이사를 온 후, 사과농사부터 시작해서 포도 복숭아 농사를 지으면서 아들 둘을 낳고 열두 핸가를 살았다. 그동안에 장모님은 늙고 병이 들어 땅을 처분하면서 딸에게 2천4백평을 물려주었다.

집터와 우사 5백평을 제한 땅에서 수확한 농산물로는 너무 빠듯한 살림살이였다. 그의 아내는 공장으로 식당으로 전전하면서 거들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형님, 인자는 ‘쯩’ 땄는기요? 내 생각에는 아직 못 땄지 싶은데, 글치요?”

나는 다시 말을 더듬거린다. ‘쯩’. 그 말끝에 나는 담배를 꺼내 문다. 나는 아직 운전면허증이 없다. 병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내게 그것은 ‘살인면허’가 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추호도 취득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대중교통론자’를 자처한다.

“농민회 사람들 다 잘 있지요? 봉기는 요즘도 소 먹이는기요? 그라고, 내가 심어 놓은 복상하고 포도나무는 아직도 살어 있는기요? 아 씨팔, 영천에 한번 가고 싶다.”

인철이는 술을 한잔 마시고 취한 것 같다. 어쩌면 그는 도시생활에 찌들어 자신이 살며 가꾸었던 땅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의 물기가 뚝뚝 듣고 있었다. 인철이가 심어서 가꾸던 복숭아와 포도는 지금 한창 수익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그 밭을 보면서도 정작 그의 얼굴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철이는 내가 몇 년을 두고 계획적으로 술을 마셔가면서 농민회로 꾀어 들인 사람이다. 그는 순박했고, 잔꾀를 부릴 줄 모르는 우직한 사람이었다. 농민회 활동도 열성적이어서 동북지회 지회장까지 지냈다. 그 바람에 내가 회장을 하던 시절, 운전수 노릇도 엄청 했지만 얼굴 한번 찡그리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부려먹고도 가끔씩 기름통만 채워주었지 짐차 바퀴 한번 갈아준 적은 없었다. 그는 농민회 일 말고는 시내 나가서 소주 한잔 같이 마실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연 있는 사람이 없어 죽어라 땅에만 매달렸다. 손은 거칠어져 북두갈고리처럼 변했고 마음은 찌들어갔다.

나라의 농업정책이 그를 도시로 내몰았다. 다시 올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문득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 <이농민을 기다리며>라는 시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젠 말할 수 있겠다/무슨 명분으로 이 땅에서 씨 뿌리며 살아가는지/명토 박듯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수 있겠다/뒷뜰에 한 오백 평 밀밭을 가꾸고/앞뜰에 또 한 오백 평 넉넉하게 목화를 심어/누이의 혼수이불을 염려하는/요즘은 뒤안 탱자나무 가시 끝에 와서 노는/햇살 한 보시기의 정겨움을 알겠고/그 가시 끄트머리에서 엘리엘리 목 놓아 우는/바람소리에도 자주 잠을 설친다/뿌리 뽑혀 도시의 변두리를 전전하는/그대들의 벅찬 노동과 쓸쓸한 삶을 생각하며/밤이 오면 추녀 끝에 등불을 내다건다/나 여기 이렇게 살아가고 있노라/내 아직 그대를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마음/불로 밝혀 하얗게 밤을 지새우노라/눈 부릅뜨고 새벽까지 창백하게 여위어 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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