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격문을 써야 할 시대

  • 입력 2009.02.02 07:52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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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 지난 22일 오후에는 기차를 타고 대구에 갔다가 기차로 돌아와 시내 술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셨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한심해서 머리 하나 보태려고 갔다가 울분만 잔뜩 짊어지고 온 자신이 한심해서 소주만 꾸역꾸역 들이켜고 말았지요.

농성하던 철거민 다섯 분이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도 집권여당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던 나약한 소시민일 뿐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나라냐고 국민들은 분노를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정당한 집행’이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이 정권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 죽음 위에 세운 ‘가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까?

22일 대구에서도 비명에 가신 그 분들을 추도하고 정권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있었습니다. 동성로 구석자리에 펑퍼져 앉아 촛불을 든 집회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백여 명 남짓 모인 자리에 그래도 영천농민회에서 두 자리 숫자를 보탠 것이 대견하기는 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내가 앉은자리는 화장품 가게 앞이었고, 그 가게 앞에는 어린 처녀 둘이서 끊임없이 호객행위를 하느라고 떠드는 통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를 않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가게 주인에게 제발 호객행위를 중지시켜 달라고 사정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차마 일어설 수가 없었답니다.

집회장소 좌우로 끊임없이 몰려오고 밀려가는 인파 속에서 잠시라도 서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K형, 그것보다 내 심기가 불편했던 건 따로 있었습니다. 차가운 아스팔트에 앉아 있던 두어 시간 내내 시대의 감각기관이라는 시인 직분에 충실했던 형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감각기관이라는 시인, 그 많은 대구의 시인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던 겁니다.  시인은 싸우는 사람입니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부당한 제도에 핏대를 세워가며 반기를 드는 것이 시인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시인들이 이렇게 직무유기를 해도 되는지 답답하고 암담했습니다.

물론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은 까닭인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이제 이명박정권의 정체는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집회 마지막에 마이크를 든 진보연대 한 책임자는 대한민국 국민인 게 부끄럽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렇게 된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이 정권을 규탄하는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 촛불이 앞으로 횃불로 바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로부터 횃불은 오만하고 부도덕하며 가증스러운 권력이 참회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촛불이 횃불로 바뀌지 않도록 하는 대책을 현 정권에 바라는 것은 무리입니까?

K형, 어제 집회 단상에 걸린 펼침막에는 “우리 생애 최악의 정부”라는 문구가 서릿발처럼 박혀 있었습니다. 나는 그 문구를 한 자 한 자 가슴에 새겨 박으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이런 자리에 부지런히 머리 하나 보태어 주고 열심히 ‘격문’을 쓰는 일밖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한때 더 이상 격문이 필요 없는 시대라고 단언했습니다. 격문이 필요한 시대는 갔다고 장담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황당한 반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역사의 수레바퀴는 거꾸로 돌아 우리 앞에 오고 말았습니다.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돌리는 웃기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화라도 이런 만화는 없습니다. 다섯 분의 죽음 위에 세우려고 하는 이명박정권의 ‘가치’는 ‘꼼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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