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신리에 가서

  • 입력 2009.01.19 08:33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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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이 마구 몰아칩니다. 소한을 지나 대한으로 가는 길목에 엄습한 한파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며칠째 꼼짝 않고 방안에 들어앉아 그동안 미루어 두고 있던 책을 읽다가 마감이 지난 원고를 붙들고 낑낑거리다가 홀연 집을 나섰습니다.

아니 느닷없다고 해야 옳겠네요. 영천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자양면 신방리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시내버스를 타는 일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노인들 대여섯 명을 태우고 출발한 버스 안 풍경은 낡은 흑백사진처럼 쓸쓸하고 음울했습니다.

영천댐 바로 아래 마을에서 노인 둘이 내리자 차 안에는 나만 홀로 달랑 남았고 버스는 그때부터 바닥이 드러날 것 같은 댐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기우뚱거리며 굽이굽이 산길을 달립니다.

아버지가 태를 묻은 우리의 세거지 노항리가 차창으로 스쳐가고 산비탈 어디쯤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놀라 펄쩍 뛰어 달아납니다.

운주산 중턱 마을 상신리에 나를 내려주고 버스는 다급하게 왔던 길을 되짚어 사라집니다. 나는 이윽히 서서 울도 담도 없는 이 오지마을을 올려다보며 쓸쓸해집니다. 사람이 사는 집보다 허물어진 추녀가 더 많은 이곳에 왜 왔는지를 몰라 잠시 허둥거렸습니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몸을 휘감으며 무슨 일이냐고 추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경로당 옆집에 사는 노파 한 분이 방에서 나오더니 마당에 묻어 놓은 무 구덩이에서 무를 몇 개 꺼내어 부엌으로 들어가는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부엌에 잇대어 있는 외양간에서 들려오는 워낭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봅니다. 외양간에서 내 귀까지 건너오는 사이에 바람에게 빼앗겨 몸집이 많이 줄어든 워낭소리는 가슴 한쪽을 흠씬 적셔 놓고 맙니다.

나는 마을 오른쪽 개울을 따라 난 오르막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갑니다. 길 옆 집집마다 외양간이 있고 외양간에는 늙은 소 한 마리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 소들 등마다 추위를 덜 타라고 짚으로 엮은 거적이 씌워져 있는데 영천에서는 이것을 ‘쌈장’이라고 부릅니다. 이 소들은 봄이면 늙은 농부들의 밭을 가는 훌륭한 일꾼이지요.

듬성듬성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담장처럼 서 있는 마을 맨 꼭대기 집은 용마루가 무너져 있고 추녀 끝에는 낡은 지게 하나가 보입니다. 저 지게를 짊어지느라 활처럼 휘어졌던 등은 먼 도시로 나가서도 고달픈 삶인지 아니면 북망산하에서 깊은 잠에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장독대 자리에는 마른 쑥대가 와욱하고 깨어진 항아리 사이로 도둑고양이가 날렵하게 몸을 숨깁니다. 마을 아래 넓지 않은 비탈 밭에는 찢긴 비닐조각을 휘감은 고춧대 풍경이 황량합니다. 먼 옛날이 내 어깨를 감쌉니다.

몇 년 후의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것이 이루어질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마을에 와서 작은 누옥 하나를 짓는 일이 꿈입니다.

여기 와서 혼자 겨울을 견디며 글을 읽고 쓰는 것이 꿈입니다. 나는 문득 십오 년 저쪽 어느 날 이 마을을 노래했던 시 〈상신리 사람들〉을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오래 묵은 설움의 족보 속을 짚어 가면/흩날리는 눈발 아래 엎드린 유랑민의 처소처럼/운주산 비알에 얼굴 묻은 상새방은 은자의 마을 같다/군불연기 오르는 굴뚝 아래 조금씩 추녀는 낮아져도/제 삶의 키를 헛되이 높여 세우지 않는/여기 사람들은/어쩌다 들르는 집배원의 우편낭을 흘끔거리지 않는다/그리움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안타까움이냐/걸어온 제 발자국을 헤아려 셈하는/세상사의 부질없음도 잊은 듯 모르는 듯 살지만/숨어서 피는 꽃인들 제 향기를 풍기지 않으랴/그들에게도 하루해는 쉽게 지지 않았다/삶의 되질이 버거운 가을 날 해거름/따비밭 가운데에서 산그늘에 발목 잡히면/마음 찌푸리지 않고/하루를 아파할 줄 아는 상새방 사람들/그들이 살아낸 한 생애의 뒷모습을 나는 보았다/지독한 그늘 밑에서도 피는 꽃/숨어서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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