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농민’과 예쁜 딸

  • 입력 2008.12.22 09:58
  • 기자명 유숙(충북 청원군 미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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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다. 모두들 먹고 살 궁리하느라 바쁘다. 신혼 초 새댁 때는 겨울이 참 좋을 것 같았다. ‘농한기 몇 달을 뒹굴뒹굴 쉴 수 있을 테니 그야 말로 겨울방학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것이었는지는 결혼하고 첫 겨울이 닥치면서 바로 알게 됐다.

벼 수매가 끝나고 마이너스 통장을 탈탈 털어 일년 내 진 빚을 다 갚지도 못한 채 남편은 산에 벌목하러 다니는 형님들을 따라 일을 다녔다. 새벽 다섯시에 도시락을 싸서 완전무장을 하고 일을 나서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그 다음해 겨울에는 면지역 수도 파이프 매설 공사일을 다녔던가? 일년 내 모종 키우고, 모심고, 밭작물 심고, 약주고, 키우고, 거두고, 팔고, 빚 갚고를 마치고 겨울이 되면 공사장에서 품을 팔아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요즘에 남편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머리만 땅에 닿으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던 사람인데 요즘엔 부쩍 새벽에 텔레비전을 켜놓고 멍하니 영감처럼 앉아 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잠이 안와서…, 자다 깨서…”라며 싱겁게 답한다. 이제 며칠을 남겨 둔 한해가 가기 전에 농협 빚 갚을 일, 기름 값에, 농약 값에 여기 저기 결제할 일들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뭘 심어도 돈이 안되니 내년 작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하기도 하겠지. 게다가 올해 태어나 이제 막 백일이 지난 너무도 귀여운 막내 아기까지 다섯 식구의 아빠로서 더 어깨가 무거우리라.

가끔 신문 보도에 보면 농사에 성공해서 돈을 얼마를 벌었네, 연봉으로 치면 억대네 어쩌네 하는 소리들을 한다. 그런 기사들을 보면 꼭 우리를 비롯한 대다수 농민들이 게으르고 모자라서 농사를 제대로 못 짓고 돈을 못 버는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 같아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안다. 돈 벌었다는 농민 한 두명을 빼면 대다수 농민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 댓가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자식처럼 키운 농산물을 제값도 받지 못하고 중간 상인들에게 떠넘기며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불시에 가락시장을 방문하여 상인 한분을 꼭 껴안으며 “우리 농민들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농협은 뭘하는 거냐?”며 호통을 치는 모습을 봤다. 가락시장 상인을 농민이라며 목도리를 둘러주고 돈 몇 만원을 쥐어 주는 것도 코미디지만 농협이 정치나 하고 이권에나 개입한다며 질타하는 모습을 보며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

지난달 11일,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 딸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이 준 빼빼로 과자를 가져와 자신도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며 사달라고 했다. 마침 아빠가 집에 안계시니 전화를 걸어 돌아오실 때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녁에 집에 돌아 온 애들 아빠 손에는 빼빼로 과자가 들려 있지 않았다.

그날 텔레비전 지역 뉴스에서 애들 아빠의 인터뷰가 나왔다.

‘우울한 농민’이라는 제목의 뉴스에서는 정말 우울한 얼굴을 한 아빠와 마을 형님이 창고 안에 가득 쌓인 나락 가마를 내보이며 우울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전화했을 때 ‘우울한 농민’인 아빠는 방송국에서 나온 분들과 ‘우울한 농업인의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새해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한 만큼만, 아니 일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농업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이라도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건강 하나 욕심내는 소박한 농민들이 먹고 사는 걱정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은 언제나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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