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의 머슴입니까?

  • 입력 2008.12.01 10:47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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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의 머슴입니까?

복이는 과부 어매 때문에
내지도 만주도 못 가는 총각.

올해도 놋쥐네 논 부쳐
짚단이나 처졌다.
 
그는 설운 입처럼 비뚜시 앉어
밤마다 새끼를 부비었다.

어느 날 밤엔 내 흰 댕기도 잊어버리고 부비다가
새끼꼬리에 지혈을 물들였다.

참 서글픈 해학과 익살로 가득한 ‘쌀 직불금 사수’를 위한 ‘서초구농민회’ 창립 산파역을 하신 박홍규 형, 오늘은 좀 뜬금없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지난달 25일 우리는 잠깐 여의도 문화마당에 앉아 영천농민회가 가지고 간 소주를 마시며 낄낄거렸지요. 위 시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영천출신 정희준 시인이 펴낸 시집 『흐린 날의 고민』에 실린 〈흰 댕기 붉은 꼬리〉 전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은 시인의 이름도 시집의 존재 자체도 한국문학사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답니다. 얼마 전 나는 우연히 이 시집의 존재를 알았고 이 시인의 행적을 찾아 헤매고 다녔습니다. 아마도 내년 초쯤 이 시집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복이’는 늙은 홀어머니 봉양해야하는 일 때문에 일본이나 만주로 돈 벌러(또 다른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 농사일에 매달려 있습니다. 바늘 꽂을 땅 하나 가진 것 없는 이 농사꾼은 ‘놋쥐네 논’을 임대해서 농사를 지었지만 남은 것은 ‘짚단’밖에 없는 기막힌 현실입니다. ‘복이’는 서럽게 우는 ‘입’처럼 삐딱하게 앉아 밤마다 새끼를 꼬는데 ‘어느 날 밤엔 내 흰 댕기’를 짚으로 알고 꼬다가 흰 댕기에 선연한 핏물을 들이고 맙니다. 얼마 새끼를 꼬았으면 손바닥에 핏물이 배어나왔을까요.

시인이 이 시를 쓴지가 70년도 더 지난 오늘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생산비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는데도 가격은 제 자리 걸음이거나 폭락을 하고 말았는데 박 형의 올 농사는 ‘짚단’이라도 겨우 처졌는지 모르겠군요. 박 형, 정희준 시인의 다른 시 〈머슴살이〉 한 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장가 못 가는 큰머슴/아비 없는 겹머슴//머슴은 다아 빚값에 든다./팔려간 색시모양 인질이다.//마을 주인네는 다아 내 빚 주인네./큰머슴 겹머슴은 황소 송아지,//황소라도 뜰 줄 모르고 뛸 줄 모르고/송아지 끼고는 자정 있는 암소!// 눈먼 모양 적은 소 큰 소,/눈먼 범이 무엇보고 어르렁거리나?//올해도 이 마을 머슴은/이 마을 국게논을 못 떠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민들은 ‘머슴’입니다. ‘인질’입니다. 박 형은 ‘큰머슴’입니까, ‘겹머슴’입니까? 우리는 누구의 ‘머슴’입니까? 부재지주의 머슴이고 나라의 머슴이겠지요. ‘큰머슴’은 ‘황소’이지만 주인을 ‘뜰 줄도 모르고 뛸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눈먼 범이 무엇보고 으르렁’ 거립니까? 범(호랑이)은 주인에게 으르렁 거리지 않고 일용할 양식인 황소를 노립니다. 이 ‘범’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오늘날 ‘제국’이겠지요.

그러나 농민들은 이런 요령부득의 농사현장을 떠나지 못합니다. ‘머슴은/이 마을 국게논을 못 떠난다’고 말하는 시인의 말이 얼마나 뼈에 사무치게 다가옵니까. ‘국게논’은 무릎까지 빠지는 ‘무논’입니다. 이 무논까지 경영하여 나라의 가난을 벗게 해준 농민들은 아직도 무능한 나라의 머슴으로 살고 있습니다.

박 형. 올해 김장은 하셨나요? 나는 오늘 윗동네 동식이 밭에 배추가 백여 포기 남았다고 해서 집사람과 부엌칼 들고 그걸 장만하러 갑니다. 언제 시간 내어서 정희준 시인의 시 〈흰 댕기 붉은 꼬리〉 시화 한 폭 그려 주시오. 내 서재에 걸어 놓고 평생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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