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농민의 가을

  • 입력 2008.11.17 07:44
  • 기자명 이재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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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맘 때면 동네고 면소재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밝고 마음의 여유가 조금은 느껴질 만한데 올해는 영 아니다. 농민대회를 준비하는 회원들의 얼굴빛도 예년같이 신바람 나고 벅찬 표정이 아니다. 하나같이 굳어 있다. 아니 비장하거나 무표정에 가깝다.

멍하니 빈 논을 쳐다보다가 문득 그 전 생각이 났다. 불과 십 수 년 전만 해도 가을 타작 철에는 농민들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수확의 기쁨도 기쁨이지만 곧 겨울이 올 테고, 수매를 할 테고, 돈이 들어올 테고, 그러면 곤궁했던 삼 계절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성스레 말려 담은 매상포대를 경운기에 싣고 트럭에 실어 행렬을 이루며 수매장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서 들마시하는 사람들, 검사관과 실랑이하는 사람들, 순서를 기다리며 불 쬐는 사람들, 소주 몇 잔에 벌써 취해버린 사람들, 무엇보다 즉석에서 오고가는 현금… 그야말로 활력이 넘쳐났다.

▲ 이재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매상이 끝나면 불뚝한 봉투 하나씩 받아들고 농협 안으로 떠들썩하게 들어가서는 직원 얼굴 똑바로 쳐다보며 “어이, 내 꺼 이자 을맨가 한 번 빼봐!” 어깨 힘도 줘보고, 그 와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딱 한 잔만!”을 주장하며 주막으로 손목을 잡아끈다.

시끌벅적한 주막을 나와 이번엔 농약사 자재상 돌며 봉투째 꺼내놓고 외상값 갚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거나한 취기로 집 대문간에 들어서며 “밥 줘!” 큰소리 치고는, 애들 죄다 불러 앉혀놓고 “니는 학교 뭐 내야 된다고 했제?” “또, 니는 뭐 필요한 거 없냐?” 기운찬 목소리로 잠바 안주머니에서 시퍼런 만 원짜리 몇 장씩 빼서 폼 나게 주기도 했다.

각시들도 빠질소냐. 날 잡아 동네 형님, 아우 몇몇 모여 시내 큰 시장 나가서 그동안 벼르던 요것조것 또 저것까지 골라 담아 터질 듯 한 장보따리를 땀 뻘뻘 흘리며 이고 지고 왔었다. 점심값 아까워 빵 한 두 개로 채운 배지만 마루 가득 부려놓은 짐만 봐도 푸지게 좋았었다.

그러고도 생필품 떨어질라 마트를 열심히 들락거리고 애들 신발 사고 겨울작업복 사고 큰 맘 먹고 예쁜 냄비도 하나 사고… 농번기 다 지난 철에 바쁘기만 한데 힘들기는커녕 신나고 즐거웠다. 심지어 서방 술값타령에도 잔소리 없이 눈 한 번 흘기고는 인심 좋게 척 내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농민들이 어디 헛돈 쓴 적 있는가. 겨우 해봤자 서방들 술값 몇 만 원에 어깨 쫙 펴지고, 각시들 장보다가 슬쩍 내꺼 부츠 하나 사 신으면 최고의 멋쟁이 아니었던가.

올해는 다르다. 전혀 즐겁고 들뜨지 않은 것 같다. 이 가을 농민들 얼굴은 웃음 가신지 오래고 약간의 기대와 설렘조차 없다. 정말이지 일 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비료값, 사료값, 비닐값, 기름값, 가스값 하다못해 벽에 박는 못 값조차 올랐으니 정신 차릴 틈도 없이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더구나 농산물 값은 예년에 비해 바닥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한 해의 마지막 작물 배추, 무도 곧 갈아엎어야 할지도 모른다.

땅 없는 농민들 심사는 더 복잡하다. 내년 농사땅은 구할 수 있을까. 아니, 이 농사를 계속 지어야 되는 건가… 힘들다, 힘들다 했지만 내가 농사 시작한 지 22년 만에 천재지변 다음으로 처음 맞는 처참한 가을이다.
이명박 정권은 농업을 죽이고 농민을 몰아내는 무서운 음모를 이제 더 이상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직불금 부당수령 문제로 분노가 하늘에 닿아있는 농민들에게 한 술 더 떠 한미FTA 국회비준까지 들먹인다. 한 마디로 농민들은 안중에 없다는 말이다.

재정경제부장관이라는 자는 더 가관이다. “이번 겨울이 더 길고 추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농민들은 오래전부터 견디기 힘들만큼 추운데, 경제 살린다던 정권이 ‘더 추울테니 각오하라?’ ‘견디는 건 알아서 견뎌라?’ 어이가 없어 뭐라 말하기도 싫다.

이제 또 우리는 ‘농민생존권 쟁취, 한미FTA반대, 식량주권 실현’을 내걸고 차가운 아스팔트로 나설 것이다. 한숨 쉬며 절망하고 있기에는 스스로에게도 자식에게도 부끄럽기 때문이다. 휴게소 길가에 질펀하게 앉아 콩나물국에 밥 한덩이 말아 먹으면서도 농민형제들이 함께 있기에 가슴이 뜨거울 뿐이다. 농업정책 본질이 바뀌지 않고는 답은 없다. 갈아엎어야 끝날 일이다.

비장할 수밖에 없다. 단박에 될 일이 아니라고 해도 하다하다 보면 괜찮은 세상이 반드시 오리라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십여년 전 여전히 고단했던 기억이지만 잠시의 행복이라도 있었던 그 때가 새삼 그립고 또 그립다. 그 때라도 돌아가고 싶은 참 쓸쓸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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