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배추값은 내가 메긴다

  • 입력 2008.11.01 11:24
  • 기자명 선애진 강원도 홍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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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애진 강원도 홍천군
유난히도 짧은 강원도의 봄, 벌써 가을이라니, 여전히 당황스럽다. 시절은 이렇듯 누가 알아주던가 말 던지 자기 알아 바뀌고 변해가며 잘 돌아가고, 내가 딛고 사는 이 땅도 철따라 색을 바꿔가며 “이런 것이 순리 아니여?” 말한다.

엊그제같이 모심느라 추리닝에 얼굴에 온통 뻘 칠하고 논두렁 밭두렁 누비던 농사꾼들이 나름 광나게 차려입고 서울로 모여들 그날도 가히 손에 꼽히는 추수가 막바지에 왔다. 이 때쯤이면 마음이 더 바빠지기 마련이다. 추수하느라 정신 없는 건 물론, 된서리에 당장 잎 끝에서부터 누렇게 변하고, 아침이면 멀겋게 언무를 뽑아 얼마나 더 버틸까…

혹시 시장에서는 값이 좀 섰나? 계속 이렇게 간다면 또 그냥 얼려버려야 하는 건 아닌지, 여름 채소도 그냥 갈아엎었는데…   안되겠다 싶어 밭으로 나가 트럭을 대고 무 작업을 시작한다. 망설이다 작업 시작이 늦어진 터라 한 참을 바쁘게 무를 뽑아 여기 저기 모아 놓는데 전화다.

한 해 내내 어느 것 하나 값을 제대로 메겨보지 못했다는 도매시장 경매사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며 “값이 너무 안서니 채소 작업하지 말라”한다. 하지만…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한계다. 농사꾼의 발소리로 자란다는 농사가, 이제 어쩌나... 누굴 잡고 하소연 한마디 할 데 없는 팍팍함이 벽처럼 터억 눈앞을 가로막는다.

부치던 박스를 휙 집어던지며 돌아서니, 여전히 논엔 누렇고 밭은 퍼렇다 못해 시퍼렇다.  비료 값이 몇 배로 뛰고 농약 값이 널뛰기해도 별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사다 뿌렸다. 모든 것이 올랐다. 하다 못해 박스 붙이는 테이프도 오르고 박스 바닥에 까는 헌 신문지 값도 올랐다. 농협에서는 벌써부터 외상값 달라, 선도금 달라고 얼굴만 비치면 거들먹거리는데,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선수 치는 것이었나 싶다. 

기가 막히다. 이른 봄부터 시작해서 살얼음 엉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족들과 함께 뒹굴며 놀아본 적 없고, 나들이 한 번 못하면서 죽어라 일만하며 지내왔다. 자식들 잠드는 건 못 돌봐줘도 날이면 날마다 논두렁 밭두렁을 누비며 살갑게 매만지던 이것들이 결국 아무짝에도 못 쓰는 물건이 될 판이라 생각하니 서럽기도 하고 분하기 짝이 없다.

긴 한숨을 다발로 묻어두고 터덜거리며 빈 트럭을 몰고 내려온다. 도저히 일이 안 잡히고 마음을 둘 데가 없다. 그래도 집에 들어와 아이들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집이라고 돌아와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니 내 맘이 울컥한다. 내색을 할 수는 없고 모르게 힘을 낸다. 밥부터 해 앉히고  이것저것 치운 듯 만 듯 더 어지럽히는 것 같아 저녁도 안 먹고 회관으로 간다.

벌써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다. 먼 데 사람이 먼저 와있다. 농민회랑 함께 준비하는 마을 간담회 차트를 만들기로 했다. 막걸리도 한잔씩 나누니 걱정 근심 없는 농사꾼들일 뿐! 손마다 힘이 나고 노래도 한마디씩 흥얼거리며 차트에 글씨를 쓰고 일정을 잡고… 올 가을 마을 간담회는 새로운 강사도 많고 더욱 더 활동에 열이 붙을 것이다. 

어어? 열 받으면 농사꾼은 일을 더 잘 한다? 억이 차면 농사꾼은 꼭 갈 데까지 가고야 만다! 우리 농사꾼의 힘으로 내 몫을 되찾아오고,  경매사가 없어도 농사꾼이 자기 배추 값을 메기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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