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農)’인지 정책·예산이 필요하다

  • 입력 2023.04.02 18:00
  • 기자명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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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수 대표. 변호사 및 공인회계사. 199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해 왔다. 현재는 농촌·농업·농민을 옹호하는 공익법률단체인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예산감시운동 단체인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승수 대표. 변호사 및 공인회계사. 199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해 왔다. 현재는 농촌·농업·농민을 옹호하는 공익법률단체인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예산감시운동 단체인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여년 전쯤에 여성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들과 ‘성인지(性認知) 예산’에 관한 논의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관련 연구작업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성인지적 관점(gender perspective)’이라는 말 자체가 사회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00인지적 관점’의 중요성

‘성인지적 관점’이란 각종 제도나 정책이 특정 성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지는 않은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검토하는 관점을 말한다. 이런 관점이 필요한 이유는 단지 ‘여성정책’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정책만이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육정책, 복지정책, 노동정책, 교육정책, 문화정책, 도시계획 등 광범위한 분야의 정책들이 여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그런 정책들을 수립하고 집행할 때에도 ‘성인지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국가재정법이 개정되어 2010년부터 정부는 성인지 예산서와 결산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게 되었다. 성인지 예산서는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칠 영향을 미리 분석한 보고서를 말한다. 이를 통해서 보다 성평등한 방향으로 정책이 수립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성인지 예산제도의 성과는 아직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 정책의 영역에 도입된 것만으로 의미는 상당히 있었다.

법제화가 되면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이뤄지게 되었다. 필자도 초기에 몇 번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여성정책을 담당하지 않는 내가 왜 이런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라는 의문을 가진 공무원들도 있었지만, 설명을 듣다 보면 ‘내가 하는 일도 여성들의 삶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00인지적 정책’의 사례는 또 있다. 국가재정법과「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에 의해 2023년 예산부터는 온실가스 감축인지 예산서도 작성되고 있다. 예산과 기금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이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운용에 반영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단지 환경부의 정책만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정부부처가 각 분야의 정책을 입안하고 예산을 편성할 때에 온실가스 배출에 미치는 영향을 미리 분석함으로써, 어디에서 얼마나 줄여야 할지를 판단하려는 것이다.

물론 2023년 예산서에 첨부된 최초의 온실가스 감축 인지예산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극히 일부의 사업들에 대해 온실가스 감축효과를 계산한 것에 불과했고, 감축량도 미미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 자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성인지’, ‘온실가스 감축인지’라는 관점이 없으면, 각 정부부처가 정책을 수립할 때에 성평등에 미칠 영향이나 기후변화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게 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이런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져서 문제이지, 이런 제도가 제대로 시행된다면 범정부적인 정책변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농’인지적 관점은 각종 개발사업과 관련해서도 절실하다. 정부부처나 지방자치단체들은 여전히 도로·공항을 건설하고 산업단지를 만들고 택지개발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농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사업대상 부지에 편입되는 농촌마을공동체가 사라지기도 한다. 지난해 1월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 ‘관지미마을' 앞 들녘에서 김기형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이 ‘공룡알’에 ‘산업단지백지화 결사저지투쟁’이라고 적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인지적 관점은 각종 개발사업과 관련해서도 절실하다. 정부부처나 지방자치단체들은 여전히 도로·공항을 건설하고 산업단지를 만들고 택지개발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농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사업대상 부지에 편입되는 농촌마을공동체가 사라지기도 한다. 지난해 1월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 ‘관지미마을' 앞 들녘에서 김기형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이 ‘공룡알’에 ‘산업단지백지화 결사저지투쟁’이라고 적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農)’인지적 관점의 필요성

물론 모든 의제와 관련해서 이런 관점이 필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범국가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한데도, 국가적인 의제 순위에서 후순위로 밀려나 있거나 소외되어 있는 의제의 경우에는 00인지적 관점의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농촌, 농민, 농사와 관련해서도 이런 접근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관련된 모든 분야의 정책을 수립하고 예산을 편성할 때, 농촌, 농민, 농사에게 미칠 영향을 미리 분석하고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보면, 농림축산식품부의 정책과 예산만으로는 농촌, 농민, 농사를 지키고 살리기는 어렵다. 농식품부는 매번 곡물자급률과 식량자급률을 올린다는 계획을 수립하지만, 오히려 자급률은 떨어지기만 해 왔다. 농촌의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멈추지 않고 있다. 70대 이상 농가경영주가 42%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앞으로 상황은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농식품부는 농지를 보전해야 한다고 하지만, 농지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연평균 1.2%의 농지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날로 심각해져가는 기후위기를 생각하면, 농지를 보전하고 농민을 지원하는 것은 전 국민의 생존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농’인지적 관점은 각종 개발사업과 관련해서도 절실하다. 정부부처나 지방자치단체들은 여전히 도로·공항을 건설하고 산업단지를 만들고 택지개발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농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사업대상 부지에 편입되는 농촌마을공동체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각종 개발사업을 벌이기 전에, 그 사업이 농지, 농사, 농촌마을공동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다른 분야의 정책과 관련해서도 ‘농’인지적 관점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의료정책이나 의료예산, 의료인력 정책과 관련해서도, 농촌지역 의료현실을 얼마나 고려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농촌지역에는 의원 하나 없는 면들도 많은 실정이다. 반면에 버스타고 병원까지 가는 것도 힘든 어르신들이 많아서 의료접근성이 매우 중요한 상황이다. 정책을 수립하는 관료들이 과연 얼마나 이런 현실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출산율을 올리겠다는 것을 국가목표로 삼고 있는데, 많은 농촌지역 기초지방자치단체에서는 읍내에도 산부인과가 없는 실정이다. 그래도 서울같은 대도시지역보다는 농촌지역의 출산율이 높은 상황이다. 대도시의 각박한 삶보다는 농촌지역에서의 삶이 나은 측면들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가까운 거리에 산부인과가 없어서, ‘이런 것 생각하면 농촌에서 살아야 하나’라는 고민이 든다는 청년부부가 있는 실정이다.

의료만이 아니다. 주택정책, 보육·교육정책과 관련해서도 농촌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정적인 주거를 보장하고, 자녀를 키우는 데 어려움이 없어야 젊은 세대가 농촌으로 들어오고 정착할 것 아닌가?

오전 9시, 정오, 오후 2시. 읍내에서 곡성군 겸면 상덕마을로 들어오는 공용버스 시간이다. 2시 이후로는 읍내로 나가는 버스도,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도 없다. 주민들은 늦은 오후에 한 대만 더 배차되더라도 읍내에서 일 보기가 한결 수월할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도시에서 누리는 다양한 행정, 교통, 의료, 편의 시설을 농촌에서 바라기엔 그 간극이 너무 크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차별 없이 누려야 할 사항을 복지라 일컫는다면 농촌의 복지는 여전히 열악하다. 한승호 기자
도시에서 누리는 다양한 행정, 교통, 의료, 편의 시설을 농촌에서 바라기엔 그 간극이 너무 크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차별 없이 누려야 할 사항을 복지라 일컫는다면 농촌의 복지는 여전히 열악하다. 한승호 기자

‘농’인지적 정책·예산의 국가적 의제화 필요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각 정부부처에서 하는 정책과 예산의 수립과정에서 농촌, 농민, 농사를 고려할 지점들은 무수히 많다. 지난겨울 난방비 문제가 심각할 때에도, 농촌지역의 난방비 문제는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면이 있었다. 각종 공공요금 인상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농촌, 농민, 농사에 미칠 영향을 미리 생각하고 정책을 수립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보면, 농림축산식품부의 정책만으로는 산적한 농촌, 농민, 농업 현안을 풀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정책에 ‘농’인지적 관점이 반영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재정법에 ‘농’인지적 관점을 명시하고, ‘농’인지 예산제도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각종 국가계획을 수립하거나 개발사업을 추진할 때에도 ‘농’인지적 관점이 반영되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기본법’에 근거조항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국가차원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농’인지적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00군(시) 농인지 정책 조례’같은 것을 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가 각 분야의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예산을 편성할 때에 농촌, 농민, 농사에 미칠 영향을 미리 예측하고, 결과에 대해서도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꿈같은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처음 성인지예산 논의에 참여할 때에도 그랬다.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제도화가 된 것이다.

게다가 2024년 총선도 다가오고 있다. 어차피 개별적인 정책제안만으로는 농촌, 농민, 농사를 지키고 살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국가 전체적인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 ‘농’인지 정책·예산 제도를 법제화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각 정당에게 제안을 하고, 총선 공약으로 채택하도록 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정말 농촌, 농민, 농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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