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산에 오르다(2)

  • 입력 2008.10.06 20:10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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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본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 본다. 해마다 벌초하고 성묘객들이 다니느라 길은 반질반질하게 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은 어릴 적 나뭇짐을 지고 수 없이 다닌 길이다.

열 살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내 등에 맞는 지게를 맞춰 주었고 나는 그 지게에다 어른들 베개만한 물거리 세 단을 하루에 두 번씩을 해다 날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나가기 전, 불알이 아직 덜 여문 동네 형들을 따라다닌 재미가 왜 그렇게도 좋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아직 불알이 덜 여문 동네 형들은 저마다 자기 아버지 담배 갑에서 몰래 몇 개비를 훔쳐내고 성냥 곽 한 귀퉁이를 찢어 종이에 돌돌 말아가지고 산에 와서 ‘빠끔담배’를 피워대곤 했다. 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농사일을 거들 때부터 형들에게 배운 짓을 그대로 따라했다.

아버지 담배를 훔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일에 매달리는 시간이면 항상 담배를 어느 한 일정한 장소에 놓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몇 개비를 훔쳐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또 방안에는 담배를 ‘보루’째로 사다 두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한 갑을 통째로 빼내오곤 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담배는 처음 피울 때 몇 번, 밭은기침이 터져 나오면서 눈물을 잴잴 흘리기는 했지만 이내 친숙 해질 수 있었다. 필터도 없는 그 독한 담배연기가 목젖에 닿는 순간의 그 아찔함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아찔한 것이라면 또 있다. 누구 주머니에도 훔친 담배가 동이 나버리고 없어 쩔쩔 매던 어떤 날이었다.

이미 인이 박힌 어떤 형은 마른 호박잎을 손바닥으로 비벼 그것을 종이에 말아 뻐끔, 뻐끔 피우면서 심하게 콧잔등을 찡그리곤 했다. 나도 그 짓을 한번 해보았는데 아아, 목젖이 낙지처럼 요동을 치면서 터져 올라오는 신물과 구역질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거웃이 돋기 시작한 형들은 곧잘 그렇게 담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갓재’를 지나 약간 경사진 길을 조금 걸어가면 ‘피밭골’ 꼭대기에 닿는다. 나는 거기서 ‘피밭골’ 골짜기를 내려다본다. 어릴 적 가을이면 싸리버섯이 많이 나던 곳에는 처녀 허리통처럼 미끈하게 솟은 갈참나무와 졸참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나는 다시 세월을 더듬어본다. 삼십 년이 넘었다. 여기 ‘피밭골’은 내 생애 마지막으로 물거리를 했던 곳이다. 나는 삼십 년 저쪽 안개 속을 더듬는다. 기억은 아찔하게 손끝에 만져진다.

그해 겨울에는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쌀 막걸리가 판매되었다. 박통(박정희 대통령)은 고난의 시절을 마침내 극복하여 쌀이 어느 정도 자급이 되었다고 판단하여 쌀로 막걸리 만드는 것을 허용했다. 1977년 12월 20일 이었을 것이다. 옥수수 막걸리에 질린 사람들은 환호작약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어설픈 우리 물거리 패들은 그 막걸리를 받아 ‘피밭골’로 갔다. 골짜기 돌무더기 위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희희낙락하며 겁 없이 마구 쌀 막걸리를 들이켰다. 나는 논산훈련소 ‘초대장’을 받아 집으로 돌아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동행한 형들은 전부 방위병 출신이거나 그 대상자라서 군대에 대해 물어볼 수도 없었다.

대병 몇 개에 담아온 막걸리는 금방 동이 났고 겨울 해는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우리는 비틀거리며 서둘러 지게를 걸머지고 흩어졌다. 민둥산에 가깝던 그 시절에는 물거리를 하려면 제각기 저만큼씩 떨어져야만 겨우 한 짐을 할 수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샅에 종소리가 나도록 열심히 나무를 베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불이야! 불이야!” 그 소리 끝에 저마다 소나무 가지 하나씩을 꺾어들고 골짜기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나 갈기 세운 적토마 같은 바람을 타고 앉은 불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버렸다. 머리카락과 눈썹까지 태워먹으며 불을 껐지만 역부족이었다.

불길은 ‘피밭골’을 다 태워먹고 ‘성비곡’으로 넘어갔다. 그때에야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와 간신히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태환이 형이었는지 광질이 아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누군가가 술이 취해 도저히 나무는 할 수가 없고 추워서 불을 피웠는데 졸았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위쪽에 벗어 놓았던 네 사람의 지게는 불에 홀랑 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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