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족쇄를 풀어 던지다

  • 입력 2008.09.16 23:25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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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삼십 도에 육박하는 초가을 더위가 맹렬한 오후에 복숭아나무 도장지 정리를 하느라고 옷이 물걸레처럼 젖고 말았다. 열매가 적게 달렸던 나무들의 도장지는 엄지손가락보다 훨씬 굵은 것들이 길솟아 울울창창이다. 덕분에 3년생 나무는 올 한해 엄청 커버렸다.

흐르는 땀을 훔쳐내느라 정신이 없는데 웬 모기는 그렇게도 달려드는지 열군데도 더 물렸다. 이 모기는 덩치는 조그만 하고 몸통이 까만데 한번 물리면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다. 수풀 속에 사는 이 풀모기는 꼭 가을이 다 되어서야 출몰하는데 땀내만 맡았다하면 게릴라처럼 습격을 한다.

나는 연신 얼굴과 목, 팔뚝을 번갈아가며 긁어댄다. 많이 긁은 곳은 엄청 부풀어 올라 벌겋다. 풀모기는 도장지를 지키는 군사들 같다. 나는 풀모기 떼의 공격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고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추운 겨울에 해도 될 일을 와 이 더위에 생땀을 흘리는기요.”

선별기가 놓여 있는 작업장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는데 윗마을 정태가 자루 하나를 메고 들어온다. 봄에 참깨농사를 짓지 않기로 작정을 하면서 미리 주문했던 것을 벌써 가지고 온 것이다. 올해는 비가 없어 참깨농사는 풍년이다. 알이 굵어 곡수도 많이 난다고 한다. 나는 정태 어깨에서 자루가 내려오기 전에 재빨리 마루 앞마당에 자리를 펴고 거기에 널어 말릴 작정인데 그는 충분하게 말려서 왔다며 기어이 마루 위에다 자루를 부려놓는다.

“형님 주는 거라고 더 많이 말렸구마, 걱정은 붙들어 매 노소.” 나는 정태를 빤히 바라보다가 방에 들어가 돈 5만원을 가져와 그의 손에 쥐어준다.

“봄날에 깨 값은 전지 해준 것으로 대신한다고 안 했는기요. 그런데 이 돈은 믄기요?” “그날 술값은 니가 안 냈나.”

“아이고 더럽어라, 개도 안 물어가는 이늠의 돈! 그날 일은 우리 일 안 했는기요.” 정태는 손에 쥐었던 돈에 땅바닥에 팽개쳐버린다. 나는 개도 안 물어가는 5만원을 주워 그의 바지주머니에 찔러준다. 그는 다시 그 돈을 선별기 쪽으로 던져버린다.

“개는 안 물고 가도 인간들은 환장을 하는 거 아이가. 그라믄 이 돈, 메주콩 값으로 받어라. 메주콩도 한 말 주기로 안 했나.” 나는 다시 정태에게 돈을 내밀지만 그는 팽하니 차에 올라가 버린다.

“콩 값은 그때 가서 보시더. 그라고 참깨는 마누라 몰래 한 되쯤 더 넣었구마. 그래 알기는 아이소.”

지난 봄이었다. 내 복숭아나무 전정하는 일도 쫓기는데 정태가 몇 번이나 찾아와 부탁을 하는 바람에 하루 반이나 그의 일을 해주고 대신 참깨 한 말을 달라고 했었다. 그의 농사는 그야말로 복합영농이다. 포도, 복숭아, 참깨, 콩, 고추, 오이, 배추, 옥수수, 고구마 같은 농사를 엄청 짓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돈 되는 작물이 없다.

규모만 컸지 실속이 없는 그에게 나는 몇 해 전 복숭아를 권했고 그것에 재미를 붙이더니 자주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렇다고 그가 생으로 나를 고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운전면허증이 없는 나를 위해 먼 거리에서 실어 와야 할 짐들을 그가 자주 실어다 주니 어쩌면 내가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악어새’인 것이다.

“배추는 좀 갈었나!?” 나는 문득 무와 배추를 심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정태에게 물어본다.

“김장거리를 준비 몬 했는기요? 형님 집에 김장할라믄 한 오십 피기는 있어야 안 되겠는기요? 그거는 걱정하지 마소. 그 대신 뽑어 갖다 주지는 몬하이 형님이 뽑어 가소.”

정태가 가고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며칠 전에 생가 어머니가 고추와 마늘을 보내왔고, 참깨와 메주콩과 김장거리가 해결되었으니 겨울 날 준비는 다 된 셈이다. 집 뒤에 조금 남아 있는 천도복숭아만 마저 수확하면 농사일도 끝이다.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켠다. 마침내 ‘거룩한’ 가을이 왔다. 가을은 나의 해방구역이다. 나는 내 발목에 채워 놓았던 어름의 족쇄를 풀어 던진다. 창고 속으로 들어가 낚싯대를 꺼낸다. 이제는 슬슬 ‘북천’에 나가 붕어들과 수작질이나 해도 될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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