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다

■ 인터뷰-전 경기도연맹 정책실장 황 재 원 씨

  • 입력 2008.09.07 15:59
  • 기자명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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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재원 씨.
서울 출신으로 농과대학을 졸업한 후 경기도 포천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중 대형 교통사고로 농업을 접어야만 했던 농민운동가 황재원(45)씨. 그는 1년여 동안의 투병생활을 마친 후 지금은 아파트관리소장으로 오뚝이처럼 다시 섰다. 그는 포천시농민회 사무국장, 전농경기도연맹 정책실장을 역임했다.

- 농민운동을 시작 하게된 동기는

▶아버지의 권유로 농대에 들어갔다가 ‘농어촌연구부’라는 써클에 들게 되면서 농업과 농민에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농어촌연구부는 현재도 5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동아리로서, 6.25전쟁 이후 농촌계몽활동등의 활동을 해 오다가 7.80년대의 격변기를 맞으면서 이념써클로 전환했다.

평택의 김덕일(전 평택농민회 회장), 김포의 이영범(현 김포농민회 월곶면 지회장)씨 등도 동아리에서 만난 동기들이다. 이후 군제대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와 보니 세상이 변해 있었다. 1987년부터 2학년 후배들 틈에 끼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4학년이 되면서 동아리연합회 기획부장을 맡아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이 지금의 농민운동과 연결되게 되었던 것 같다.

- 포천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형제중에서 유일하게 대학 졸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차남 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모든 기대가 나에게 쏠려 있었다. 그동안 학생운동을 하면서 농민운동으로 마음은 굳혔지만 집안의 기대와 나 자신의 진로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이곳 포천이었다. 어른들이 살고 계신 서울 상계동과 아주 가까운 곳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어떤 농사를 지었나

▶첫 번째 농사는 도라지 농사였다. 당시 농민회 회원 한 분과 같이 2천여평에 도라지를 심었는데 농민회 활동에 정신을 팔다 보니 도라지 밭은 모두 풀들에게 점령되어 버렸다. 결국 생산비도 건지지 못한 채 첫 번째 농사를 마쳤다.

1992∼1993년엔 논에 모를 내지 못한적도 있었다. 그해에 포천에서 많은 농민들이 자살을 했다. 가뭄으로 인해 논에 물을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 농민들도 물싸움에서 밀려나 자살을 하는 판국에 나같은 초보자에게 물이 돌아올 이가 없었다. 그해 3마지기의 논에 모를 내지 못했다.

그 후 한 농민회원의 추천으로 도배 학원을 다닌 후 도배사도 했고, 속셈학원 원감도 했다. 우유배달도 했고, 버섯농사도 했다. 농촌에 살면서 해볼 수 있는 일은 안해본 일 없이 모두 다 해 보았다.

- 지금은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고 있는데

▶2003년에 큰 사고를 치뤘다. 상대편 차가 중앙선을 침범해 왔는데 당시 13곳에 골절을 입었다. 뼈란 뼈는 거의 모두 부러졌는데 생명과 직결된 곳은 모두 안전하다며 의사들이 혀를 찼다. 정말 재수가 좋았다.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더 이상 농사는 힘들 것 같고...결국 교통사고로 인해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셈이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공부를 시작했다. 2004년 한해동안 주택관리사, 컴퓨터활용능력2급, 워드프로세스2급등의 자격증을 땄다. 당시 취득한 주택관리사자격증으로 인해 현재 3년째 아파트관리소장을 하고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교통사고 이후 몸도 예전 같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공인노무사 시험 1차에 합격을 하고 얼마 전 2차 시험을 치른 후 9월24일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모두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지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살아 남아 우리의 저력을 스스로 확인하도록 하자.

농민 여러분들의 건투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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