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상민 선생님! 이제 저는 형님이라고 고쳐 부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형님은 평소 농민과 더불어 평생을 함께 하신 그 애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님께서 일구어 가꾸셨던 협동조합운동의 씨앗은 아세아에 그 업적을 남기셨고, 나아가서 농민운동과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앞장서서 개척하셨습니다.
이제 형님께서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신 지가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역사 앞에서 형님께서 이룩하고자 하신 단결된 협동의 힘으로 민중의, 농민의 해방을 하지 못한 게으름을 다시 사죄드립니다.
저는 형님께서 공부해야 하신다며 ‘야마기시까이’공동체를 방문할 기회를 함께 했을 때,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보니 저 혼자였습니다. 이때 저는 ‘태양의 집’ 앞에서 충격적인 공부를 했습니다. 스위스에서 온 가족으로 보이는데 쌍둥이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세 살 정도 돼 보이는 아기들이 제 신발을 들고 가서 자기 이름이 써 있는 아래에다 넣고는 거기서부터 어머니와 헤어진다는 말은 어른들이 함께 갈 수 없다는 규칙이었습니다.
여기서 형인 아기는 흥얼거리며 가는데 동생은 5m쯤 가더니 뒤돌아보며 제 엄마를 보고는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엄마는 오라고 하여 꼭 껴안고 한참 있더니 하는 말이 “너 이제 갈 수 있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걸어가다가 또 뒤돌아 보더니 우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엄마는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그 아기는 다시 엄마품에 꼭 안겼습니다.
한참 있다가 엄마는 아기에게 물었습니다. 그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가겠다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제 형과 손을 잡고 이번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흥얼거리며 저 끝에 87계단을 조용히 걸어서 비틀거리며 내려갔으리라 생각하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은 제 방북사건으로 인하여 이길재 회장, 김상덕 회장, 형님, 정성헌 국장과 줄줄이 수갑을 차고 호송차에 올라타서 형님 죄송합니다 하면 “야, 난 괜찮다. 근데 네가 많이 받을 것 같다.”며 걱정을 하셨고 법정에 섰을 때 뒤돌아보면 형수님이 제일 먼저 보이는데 똑같은 분이 두 분이 앉아서 평안한 얼굴로 저와 눈길이 마주쳤을 때 아무 일이 없다는 식의 그 모습은 저에게 큰 힘을 주셨습니다.
형님, 우리 가농이 40주년을 맞으며 대토론회에서 가농 헌장을 다음과 같이 개정했습니다.
“우리 농민은 민족적 자주독립과 민중의 자유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험난하고 줄기찬 투쟁을 전개해온 자랑스런 역사를 바탕으로 참된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이룩하고, 인류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생명과 평화를 해치는 일체의 요소들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모든 생명을 아끼고 모시고 살리기 위해 공동체적으로 협동하고, 생명의 특성인 다양성, 관계성을 드높여 생명공동체 대동세상을 이룩해야할 문명사적 대변혁운동의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라고 고침은 초창기의 그 순수했던 우리들의 뜨거웠던 사랑들이 식어가지 않나 하는 느낌은 왜 오는 것일까요.
요즘 우리 활동들이 유기농산물 직거래니 하는데서만 맴돌고 있는 느낌입니다. 한편으로는 섭섭합니다. 헌장에서도 밝혔듯이 평화와 통일의 큰 과제가 우리의 목표이거늘 어이하여 농산물 장사에만 매달려 있는지 한심합니다.
형님,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외칠 겁니다. 그쪽으로 가면 망한다고. 형님,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다가 부활의 아침에 손잡고 일어나 춤을 훨훨 추십시다.
이 글은 지난달 27일 농민운동, 협동조합운동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고 이건의 선생의 7주기를 맞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소재 인건운 선생 묘소에서 열렸던 추모행사에서 서경원 전 의원이 낭독한 추도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