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

  • 입력 2008.09.01 12:00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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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농사만 짓는 후배에게 복숭아나 좀 갖다 먹으라고 했더니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음료수 한 통을 건네준다. 뭘 이런 걸 들고 왔느냐고 나무라며 들여다보니 영어로 ‘델몬트’라고 적혀 있는 자몽 주스였다. 물건을 산 곳에 가서 제주산 밀감 주스로 바꾸어 먹으라고 했더니 요즘 세상에 그까짓 것을 따지느냐고 오히려 나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나는 억지웃음을 머금으며 녀석의 옆구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알았다. 다음에 내가 느그 집에 갈 일이 있을 때 미국 쌀 한 포대기 갖다 주꾸마.”

“말대가리에 뿔나기 전에는 그런 일 없을끼구마. 어휴, 저 수구보수꼴통!”

나는 서둘러 복숭아 한 상자를 담아 주어서 그를 보내고 계속 일을 하는데 어머니는 녀석이 사온 주스 병을 하나 꺼내 마시고는 내게도 권하며 가지고 온 성의를 그렇게 면박하면 안 된다고 나무라신다. 마셔보니 자몽 주스는 달고 맛이 썩 괜찮다. 내친 김에 나는 다시 하나를 더 마신다. 좋다. 자몽은 달콤하고 감칠맛이 있다.

나는 자몽 주스 병을 들여다보며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그것은 텔레비전 광고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 광고에 어깃장을 놓는 〈이 더러운 말을 추방합시다〉라는 시를 썼었고 그 시는 1992년에 나온 시집에 실려 있으니 대충 짐작은 할 수 있다.

그 광고에 나온 꼬마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자라 집권여당의 국회의원이 되어 있다. 지난 봄, 나는 그가 홍씨 성을 가진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고 문득 옛날 광고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 시는 이렇다.

“시끄럽게 관심을 자극시키며 시작하는 텔레비전 광고가 하나 있었습니다. 저것이 무엇이지? 원경으로 잡아 더욱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수상한 나무숲 위로 헬리콥터가 투타타타 날아갑니다. 그리고 그 숲 사이로 시원하게 뚫린 길을 따라 달려가는 무개차도 퍽 인상적으로 보입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썩 괜찮은 광고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웬 코쟁이 녀석(놈은 안경을 걸쳤다)이 시험관 하나를 들고 있다가 불쑥 엄지를 치켜세우며 외칩니다. 따봉!

그 소리 끝에 사내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두 손으로 허공을 할퀴고 쥐어뜯고 휘저으며 지랄발광을 하기 시작하는데, 엄청난 노란 과일들이 쏟아지고 쏟아지고, 하늘로 하늘로 치솟아 오를 즈음 화면에는 ‘따봉은 브라질어로 매우 좋다는 뜻’ 이라는 자막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지나갑니다.

그 뒤로 우리 사회에는 신조어 하나가 전염병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버릇처럼. 그런데 지금은 그 광고가 없어지고 “델몬트 따봉 주세요” 라고 호소하는 노래로 바뀌었는데, 이 광고의 주연은 남궁원과 그 처자식과 그 집 개새끼이며 롯데 칠성에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이 더러운 말을 추방합시다. 따봉, 따따봉!”
국제화시대에 걸맞게 지금은 많이 시들해졌지만, 그 당시 내 눈에는 신록처럼 울창해지는 망국의 징조가 만국기마냥 펄럭거리고 있었다. 국내 제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외제수입 허용시기를 최대한 늦추어야 한다고 거품을 물고 나발 불던 재벌기업들이 수입자유화시대를 맞아 보인 표리부동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낯이 뜨겁다.

업체들은 다투어 신제품 개발을 포기하고 된장과 간장에서 짭짤하게 재미를 보더니 새우젓에서 무말랭이에까지 검은 손을 댔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추장과 개고기까지 수입 해오는 참 염치없는 자본주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국제무역에서 수지가 좋으니, 생산을 포기하고 무역을 선택하더니, 먹을거리 생산도 포기하라는 제국의 홍위병이 되어버린 재벌들의 ‘하여가’를 부르며 일삼은 가렴주구(?)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북망의 산 아래 지팡이 짚고 피는 할미꽃 같은 농사꾼들이 ‘단심가’를 불러본들 누가 있어 듣기나 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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