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욕창 생길라

  • 입력 2021.09.12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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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을 처음 취재하기 시작하고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농협 특유의 폐쇄성이었다. 어떤 사안을 취재하는 데 있어 필연적으로 소통해야 할 담당 사업부서들은 언론 접촉을 극도로 꺼리고, 홍보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는 답변은 매우 제한적·형식적이다. 관료사회의 경직성과 대기업의 폐쇄성을 동시에 두르고 있는 게 농협 조직이며 이는 중앙회와 회원농협을 가리지 않는다.

폐쇄성은 당연히 농협 스스로 ‘잘못하고 있는’ 사안에서 극대화된다. 기자로서 정상적인 취재활동이 불가능할 지경이며 결과물(기사)에 대한 반응과 압박도 여느 기관·단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자신들이 잘못한 일을 그토록 철저하게 숨기려고만 한다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전북 9개 지역농협 부실대출 사건의 취재 과정 역시 험난했다. 사건의 개요와 피해 현황, 농협의 입장을 파악하기 위한 하나하나의 경로가 막혀 있었고, 농협중앙회가 9개 농협에 전달한 ‘제재내용 공시’ 문서라도 참고하고자 농협중앙회에 문의했지만 “내부 문서라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런데 이 문서는 어처구니없게도 농협중앙회 홈페이지에서 제약없이 열람할 수 있는 문서였다. 애당초 ‘공시’ 문서를 “공개할 수 없다”고 한 그 답변부터가 괴상하거니와, 이 농협 직원은 공개가 돼 있는지 아닌지도 살펴보지 않고 일단 무조건 공개를 거부하고 본 것이다.

물론 이 문서 자체도 폐쇄적이기 짝이 없다. 전북지역 전반에 얽힌 대형 스캔들임에도 문서는 A4용지 한 페이지씩에 불과하며 각 지역농협이 다시 게시한 공시는 고작 몇 줄 분량이다. 기자는 물론 해당 농협들의 농민조합원들도, 심지어 임원인 이·감사들까지도 이 한 장짜리 자료 외에 정확한 내용파악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시 어렵사리 입수한 농협중앙회 전북지역본부의 ‘전북농협 부실대출 재발방지 대책’에선 이번 사건의 원인을 경기침체와 직원 개인 과오로 진단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실만 모아 봐도 조직적 비리의 정황이 너무나 명백한데 말이다.

정말로 잘못을 바로잡고 재발을 방지코자 한다면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맞을 매를 다 맞은 뒤, 농민조합원들과 머리를 맞대야 할 일이다. 고름 짜기가 무서워 그저 꽁꽁 숨기려고만 하는 농협. 이러다 욕창 생길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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