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서 복숭아 주문을 받다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45

  • 입력 2008.08.25 16:34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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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9일. 복숭아를 실어 보내고 나서 예초기를 메고 수확을 끝낸 강 건너 밭에 가서 풀을 베는 데 전혀 땀이 흐르지를 않는다. 바람이 제법 불어서 그런가 싶어 하늘을 보니 태양이 그다지 강렬하지 않은 것이 벌써 가을이 온 모양이다. 그토록 잔인했던 혹서기가 벌써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허탈해지고 섭섭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날씨가 서늘해지면 복숭아 수확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날씨가 서늘해지면 복숭아 가격도 내리막길을 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위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씁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가 지운다. 그러고 보니 올 여름에는 한 번도 비 맞으며 복숭아를 딴 기억이 없을 정도로 날씨는 무더웠다.

얼마 전에 깎은 밭의 풀들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높이에서도 악착같이 조악한 씨앗을 밀어 올리고 있다. 종족본능은 저것들이 훨씬 치열하고 극성스럽다. 나는 잔인하게도 그것들에게까지 칼날을 들이대어 거침없이 밀어버린다. 풀들의 피 냄새가 코끝에서 싱그럽게 느껴진다. 그런 내가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저물기 전에 돌아와 목욕탕에서 끼얹는 물이 차갑게 느껴진다. 가을이 오기는 온 모양이다. 옷을 갈아입고 땅거미가 내리는 뒷마당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곧 수확해야 할 복숭아나무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뚜리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귀뚜라미 저 우주의 전령사가 타전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확실하게 가을을 가슴으로 받아 안는다. 저 놈은 극한의 더위 속에서 저 우주의 운율을 익히며 득음을 하느라고 참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삽시간에 천지를 삼켜버린 어둠 속에서 나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다.

“야가 어데 갔노. 밖에 있나, 전화 받어라.”

어머니 목소리가 귀뚜리 울음을 싹 쓸어버린다. 나는 나쁜 짓을 한 아이가 교무실로 불려가듯 미적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다.

“저 심은정인데요. 제 이름 기억하세요?”

나는 기억을 더듬지만 그 이름은 도무지 떠오르지를 않는다. 절벽처럼 깜깜하다.

“몇 년 전 서울에서 복숭아 주문했던 한신영인데요.”

“아아, 예.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복숭아 주문하던’ 이라는 말에 나는 그 이름을 떠올리고 어눌하던 목소리에 활기를 보탠다. 그녀의 음색은 몇 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맑고 곱다. 나는 옛날 애인의 전화를 받은 것 같은 달뜬 기분이 된다.

한신영. 그녀는 삼년 전까지만 해도 사점오 킬로그램 복숭아를 삼백 상자가 넘도록 팔아주던 단골 고객이었다. 그녀는 어느 해 여름 한철을 주변 사람들에게 내 복숭아를 사서 보내 맛을 보이고, 그 맛을 본 사람들이 돌아가며 사서 보내면서 고객도 엄청 늘었었다. 나는 요 몇 년, 한 번도 복숭아 주문을 하지 않더니 오늘은 웬일이냐고 물어보았다.

“여기는 시드니예요. 여기 온지 한 삼년 됐어요.”

“시드니라고요? 이민 가셨어요?”

“아니요. 애들 교육 때문에 감방살이 하고 있어요. 요즘도 복숭아농사 지으시나요?”

그녀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음색으로 물어왔다.

“그럼요. 올해는 비가 그의 없어서 복숭아 맛은 엄청 좋습니다.”

“어머, 그래요. 영천 복숭아 먹고 싶어 미치겠어요.”

“어쩌지요. 시드니까지는 배달이 안 되는데요.”

그녀의 침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이 안타까웠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녀는 복숭아를 주문했다. 서울에 있는 남편과 부모님, 그리고 남녀 동생 두 집, 도합 여덟 상자를 부탁하면서 돈은 남편이 보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시드니에서도 복숭아를 주문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끝에 귀국하면 우리 밭으로 한번 초대하겠다는 뜻을 전했고,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녀의 말투가 시무룩하게 들렸다. 북으로 난 창 밖으로 다시 귀뚜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귀뚜라미가 운다는 말을 할려고 했는데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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