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으로 사는 것

  • 입력 2008.08.25 16:29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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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하 수상하다. 산골 농투성이가 어찌 세상 돌아가는 속내를 자세히 알랴마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이 하나같이 위태롭기만 하다. 그 동안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이 성숙하고 더불어 민족적 자존심도 높아졌기 때문에,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세계외교사의 치욕으로 기록될 쇠고기 협상에서부터 굴욕적인 한미동맹강화까지 불과 반년 사이에 우리는 완전한 미국의 종속국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에 대해 과거의 물대포와 백골단이 되살아나고, 5공시대를 방불케 하는 언론 탄압과 방송 장악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농민을 비롯한 서민들의 생존권은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최대 뇌관이라 할 양극화 문제, 그 중에도 백척간두에 서 있는 비정규 노동자와 농민 문제는 아예 사회적 논의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다. 이 뇌관을 슬기롭게 관리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폭발하리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어렵고 골치 아픈 문제라고 모두들 눈을 감아버린 걸까. 어이없고 한심한 위정자들의 행태에 분노가 치민다.

주름살과 새카맣게 탄 얼굴로 논밭에서 땀을 흘리는 농민은, 이제 국민의 먹을거리를 위해 고생하는 농민 형제가 아니다. 천하고 험한 운명을 타고난 이 사회의 낙오자일 뿐이다. 수십만원짜리 양주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자들이, 고추밭 가에서 뜨거워진 소주를 털어 넣는 사람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할까?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여 그들의 식탁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기계로 보지 않을까? 그렇다. 언제부턴가 농민은 우리 사회의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대놓고 말은 못해도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어서 늙어 죽든가 거대 영농기업에게 땅을 넘기고 떠나라. 굶어죽지는 않게 농업은퇴연금제도를 만들어 주마. 이것이 바로 이 사회가 농민에게 던지는 전언이다, 비웃음이다.

농민으로 사는 것 자체가 더럽고 치사한 일이 되었다. 농민들의 상경 시위가 있던 날, 나는 인터넷의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잔에 따를 새도 없이 소주 병나발을 불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부들부들 떨렸다. 댓글의 대부분이 농민들에 대한 욕설과 비아냥이었다. 농민과 농촌 현실에 대해서는 마치 다른 나라의 다른 인종의 문제인 것처럼, 온갖 비난과 조소를 퍼붓는 그 글들에 나는 절망하였다. 입에 담기도 싫은 그것들이 소수의 의견이라고 위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 농민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이다. 우리는 고립되었고 이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거대한 자본의 수탈 체제가 마침내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한 계급을 고사시켜 버렸다.

희망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막바지에 몰리면 사상 초유의 농민 파업이 일어날 수도 있을 테지만 노동자 파업과 함께 하지 않으면 패배하는 싸움이 될 것이다. 어떤 식이 되던지 억눌린 분노와 생존에 대한 욕망, 인간으로 살고 싶은 본능 등이 뒤섞여 폭발이 일어나리라. 그리고 불 탄 자리에서 새 순이 돋듯이 이 땅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무언가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리라.

힘겹게 이어가는 우리나라 농촌의 명줄이 끊어질 때까지 농민들의 고통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이미 정신을 놓아버린 농민들이 주위에도 숱하게 많다. 자신을 갉아먹는 줄도 모르고 자본이 넣어준 생각을 머리 속에 담고 있으니 이미 죽은 농민이다. 괴로운 날들이 오래도록 계속될 것 같다. 

최용탁 (충북 충주시 엄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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