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서에 수록된 장이 오다

‘팥장’ 등 전통장 만드는 홍주발효식품 이경자씨
오직 토종종자 콩·팥만 쓰며 지역소농과 상생도

  • 입력 2021.01.29 09:56
  • 수정 2021.01.29 10:20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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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이경자 홍주발효식품 대표가 보관 중인 메주들 앞에서 전통발효 된장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경자 홍주발효식품 대표가 보관 중인 메주들 앞에서 전통발효 된장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얘는요, 대선배 어르신이에요. 막 담근 장에 넣어주면 ‘야 장맛이란 말이지,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지도하는 거죠. 새 장이 ‘아 이런 맛이군요?’하면서 따라오니까 항상 평이한, 같은 장맛이 나올 수 있는 거에요.”

새 된장을 만들 때 섞을(덧장을 댄다고도 한다) 용도로 묵힌 씨앗장을 설명하는 입담이 예사롭지 않다. 충남 홍성군 금마면에 ‘홍주발효식품’을 세운 이경자씨는 공무직에서 은퇴한 뒤 자신의 일을 돕겠다 나선 남편 김홍재씨와 함께 전통장 제조에 몸을 불사르고 있는 ‘발효명인’이다.

상담학 전공으로 본래 전문상담사 활동을 했던 이씨는 다양한 문제를 겪는 성장기 아이들을 돌보곤 했는데, 가공식품에 익숙한 아이들이 식생활 개선을 통해 변화를 겪는 모습을 보고 좋은 먹거리를 만드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이 너무 난폭하고 폭력적인데, 학교에 청량음료 자판기를 없앴더니 훨씬 나아졌다는 연구결과를 봤어요. 한 교수님도 ‘먹거리 체계가 망가진 탓이니 상담을 하지 말고 밥을 해주세요’라고 하시는 거에요. 하루 식단을 그려보라고 했더니 패스트푸드만 나오더라고요.”

많은 먹거리 중에 발효식품을 선택하게 된 계기도 재미있다. 스스로 장을 담그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은 것도 있지만, 상담 관련 자격의 실기시험을 위해 간 요양원에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예전에 엄마가 만들어준 된장국’을 마지막으로 찾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관계가 단절된 가족과 화해하고 죽길 원했던 어떤 이는 그 유일한 연결고리로 ‘할머니가 만들어준 장아찌’를 꼽기도 했다.

“참기름하고, 파, 마늘 넣고. 그 분이 기억하는 대로 장아찌을 만들어서 며느리에게 줬어요. 며느님, 이걸로 어머니 마음을 녹여보세요, 하고요.”

장아찌를 하려니 장이 필요했다. 많은 장이 필요하다보니 결국 온갖 장을 스스로 담게 됐다. 장으로 세 번의 ‘편안한 임종’을 인도한 이씨는 결국 상담사의 길을 접었고, 그렇게 홍주발효식품은 2017년 1월 7일 문을 열고 전통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발품을 통해 판로를 확보했던 첫해를 지나 매년 성장해 지금은 장독대가 100여개까지 늘었고, 된장의 생산량은 연 4톤에 이른다.

 

황토방에서 발효 중인 메주 위에 앉은 곰팡이균을 다른 메주들에게 골고루 뿌려주는 모습.
황토방에서 발효 중인 메주 위에 앉은 곰팡이균을 다른 메주들에게 골고루 뿌려주는 모습.

 

주력 상품인 된장은 강된장, 쌈, 소스, 찌개 등 어느 요리에도 어울리는데, 콩으로만 쑨 메주를 발효시켜 만든 순수 된장뿐만 아니라 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복원해 만든 다양한 된장이 있다. 그 중 하나인 '더덕도라지장'을 예로 들면, 이씨는 '구황촬요(1554)'와 '온주법(1700년대 후반)'의 잡장법에 나온 제조법을 참고했다. '사시찬요(1483)',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본래 더덕도라지장은 우선 더덕과 도라지를 빻아 가루낸 뒤 쓴맛을 빼기 위해 물에 우려 장을 담갔으나, 구황촬요에서는 '더덕과 도라지를 푹 익혀 머리를 떼어내고 흐드러지게 찧어서 소금을 섞고 사이사이에 메줏가루를 넣어 담근다'라고 했고, 잡장법에서는 '삶은 뒤 우리라'라며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경자씨의 더덕도라지장은 '구황촬요', '온주법' 등의 문헌에 나온 방법대로 더덕과 도라지를 가루 내지 않은 상태로 익힌 뒤 찧어서 만든다.
이경자씨의 더덕도라지장은 '구황촬요', '온주법' 등의 문헌에 나온 방법대로 더덕과 도라지를 가루 내지 않은 상태로 익힌 뒤 찧어서 만든다.

 

그 밖에도 주원료가 되는 콩 자체를 달리한 것으로는 약용으로 이름 높은 쥐눈이콩을 활용한 ‘쥐눈이콩된장’과 당도 높은 서리태콩을 쓴 ‘청태장’이 있고, 순수된장과 혼합장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실장’은 ‘더덕도라지장’과 마찬가지로 상수리열매를 넣어 색다른 맛을 추구했다. 한 번 먹어보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어야 한다’는 토종예팥 팥장도 있다.

이씨는 자신이 만든 발효장의 가치를 각종 특허와 한식대가, 농업기술명인 선정 등 여러 가지로 입증했지만, 아무래도 가장 크고 멋진 간판은 ‘맛의방주’일 것이다. 이씨의 팥장은 슬로푸드국제본부가 전 세계를 범위로 진행하고 있는 전통 음식·문화 보전활동 맛의방주에 지난 2017년 등재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맛의방주는 지역과 전승을 기반으로 하는 토종 농산물 및 전통식품 중 우수한 가치를 지닌 것 가운데 여러 가지 이유로 사라질 위험에 놓인 존재를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작성되고 있는 전통식품 목록이다. 소멸 위기의 전통장을 만드는 이에게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있을까.

홍주발효식품에서 생산하는 간장·고추장·된장·청국장 등 모든 장 제품엔 ‘전통식품 품질인증’ 마크도 2018년부터 붙었다. 전통식품 품질인증은 국산 농산물을 주원료 삼아 우리 고유의 맛과 향을 낸 전통식품임을 보증하는 국가 인증으로, 그 까다로운 기준 탓에 개인이 얻기에는 쉽지 않은 표식이다.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에 비해 일반 소비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HACCP과 마찬가지로 제조설비와 주요공정, 용수 등의 적정성 및 각종 위생에 있어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전통적인 방법대로 장을 만들긴 하지만 발효 과정을 뒷받침할 세척, 분쇄, 건조 등의 각종 공정은 최신식 설비의 도움을 받는다. 이씨는 포기하지 않고 혼자 열심히 하고 있다 보니 충청남도와 홍성군에서 보고 많이 도움을 줘 얻은 결과라며 감사함을 표했다.

작업장 옆엔 3평 남짓한 조그마한 창고가 있는데, 메주를 만들 때 쓰이는 온갖 식량작물 자루가 들어 차 있는 공간이다. 이씨에게 이곳은 메주가 들어찬 황토방이나 장독대가 가득한 비닐하우스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공간이랄 수 있다.

“원료는 전부 지역에서 조달하고 외부에서는 안 가져 와요. 기준이요? 무조건 국산, 그리고 웬만하면 유기농. 저희가 장을 한다고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조금은 눈치를 보면서 ‘뭐하는 거에요’ 하고 물어봤다가 자기가 재배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얼른 얘기하죠. 저는 ‘저 다 주세요, 제가 씨앗을 드릴게’ 하죠.”

 

이씨는 지역 소농들이 생산한 토종 콩과 팥으로 장을 생산하고 있다.
이씨는 지역 소농들이 생산한 토종 콩과 팥으로 장을 생산하고 있다.

 

지역 농민들이 수확한 농산물만을 쓴다는 점도 놀랍지만, 더욱 대단한 건 이들의 기원이 대부분 토종종자라는 점이다. 콩은 ‘흰밤콩’, ‘나물콩’, ‘흰강낭콩’, ‘겉청태’, ‘풀대콩’, 팥은 ‘예팥’, ‘재팥’, ‘개골팥’ 등 이씨 자신도 겉모양을 보고 바로 이름을 대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그가 장을 담그는 이상 매년 토종 콩과 팥을 수없이 들이고 또 내보낼 이 창고는 전통장을 넘어 가장 바람직한 원재료라 할 수 있는 토종종자의 보존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토종종자를 키우고 있는 농민을 거주지 인근에서 전부 찾아 수요를 맞추긴 어려우니 택한 방식이 바로 특유의 계약재배다. 전통식품 품질인증을 위해서는 식품에 쓰인 주원료가 국내산임을 입증해야 하는데, 생산자로부터 원료를 직접 공급 받는 경우 재배계약서로 이를 증명한다. 이씨는 이 계약서에 ‘종자는 홍주발효식품에서 제공한다’는 내용을 추가한다. 스스로 수집한 토종씨앗을 농민에게 계약면적에 맞게 제공하고 그 씨앗으로 수확된 전량을 수매하는 형태로 창고를 채우는 것이다. ‘좋은 장’의 핵심은 ‘좋은 콩’이라고 단언하는 이씨는 그 좋은 콩이란 게 바로 우리가 예전부터 쓰던 토종 콩이자 우리 지역의 콩이라며, 상생의 활동을 바탕으로 전통장 확산에 계속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토종씨앗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보통 유기농에 뜻이 있는 귀농인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도 토종농사를 했다가 판로가 없어 결국 잡곡으로 싸게 털어버리고 나면 힘이 빠지기 일쑤에요. ‘괜히 귀농했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고 좌절하는 사람을 찾아요. ‘내가 가공할 테니까 심으라’고 권유하고 그걸 제가 다 사는 거죠. 씨앗은 잘 가지고만 있다고 보존되는 게 아니에요. 적극적으로 가공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심는 사람도 나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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