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석골로 피서를 가다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43

  • 입력 2008.08.10 17:59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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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바람으로 한창 신바람을 타고 있는데 전화 걸려오는 소리가 신명을 깨트리고 말았다. 나는 손오공이 타고 다니던 근두운을 타다가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는다.

“내일 복상 따나?”

밑도끝도없이 경철이가 느닷없이 묻는다.

“안 따면 우야노, 따야지. 와?”

“서울에는 비가 억수로 온단다. 내일은 따지 말았으면 싶은데 우얄끼고?”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북창 밖으로 복숭아밭을 내다본다. 뱃살 붉은 복숭아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것이 보기에도 좋다. 올해는 그나마 가격이 좋아 바라볼 때마다 저게 다 돈인데 싶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그런데 경철이의 말 한 마디에 그만 그 풍경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만다.

서울에 비가 많이 오면 복숭아 수확을 미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종잡을 수 없는 착잡한 기분으로 담배를 꺼내 문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날씨 탓이 아니라 서울 사람들 기분에 따라 농산물 값이 널뛰기를 한다는 것이 서글퍼졌던 것이다. 농산물을 수확하는 데에도 상전 눈치 보듯 서울 사람들의 심기를 살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루 미루면 일이 틀어져 버릴낀데 그래도 우야겠노. 내일은 함 쉬자.”

나는 다시 마룻바닥에 엎드려 책을 펼쳐든다. 모처럼 청석골을 벗어나 서울에 온 꺽정이가 느닷없이 첩을 셋이나 둔 외입장이가 되어 논다니 생활을 하고, 그 사실을 처남인 황천왕동이에게 들켜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된 꺽정이 마누라가 달려와 난장판을 벌이는 대목에서 책장은 넘어가지 않는다.

청석골 피서를 시작한지 오늘이 닷새째일 것이다. 오전 열 시에서 열 한 시 사이에 작업을 마치고 오후 여섯 시까지의 혹서기에 공판장에 나가 마시던 술에도 진력이 나고 해서 무엇을 할까 궁리하다가 책장을 뒤져 열 권짜리 임꺽정을 꺼냈는데, 80년대에 나온 책이라 글자가 너무 작아 돋보기를 쓰고도 읽기가 힘이 들었다. 서점에 나갔더니 근래에 새로 펴낸 것이 있는데 글자도 크고 원전을 새롭게 보완한 것이라 새로 한 질을 구해 다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십 년이 넘어 다시 읽는 임꺽정은 전혀 새로운 맛이었다. 고리백정 소백정이었던 꺽정이가 인간백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선 민중들의 참혹한 삶과 그 대척점에 있던 서푼짜리 조정대신들의 구역질나는 이야기가 장강대하를 이루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어릴 때 보지 못했던 것, 젊었을 때 보지 못한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곤 한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0-30년대에 이렇게 유려하고 역동적이면서 신바람 나는 소설을 썼다는 것이 이채롭기 짝이 없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까지 지낸 벽초 홍명희.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와 더불어 조선 3재(三才)라 불렸던 벽초는 1928년에 시작하여 십 년이 지나도록 이 소설을 썼지만 끝내 완성을 못한 임꺽정을 이 불볕더위의 피서지로 삼는 것은 어떨까. 우리들 농사꾼들이야 피서지가 논두렁밭두렁 아니면 마을 앞 냇가 나무 밑이거나 기껏 근방의 골 깊은 계곡이겠지만, 어느 날 문득 ‘청석골’을 찾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일 것이다. 읽는 내내 등줄기에 써늘한 냉기가 흘러내리던 꺽정이 패의 활약상이 때로는 당신을 서림이처럼 헤헤거리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단연 이 나라 최고의 작품이다.

마루온도가 삼십이 도나 올라가면서 선풍기에서는 더운 바람이 쏟아져 나온다. 어머니는 ‘테레비’에서 보니까 전기세 아낀다고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더라고 은근히 내게 협박을 한다. 나는 목욕탕으로 나가 머리꼭지에 찬물을 끼얹는다. 우물에서 끌어올린 물은 더운 피를 식히며 전신에 살얼음이 깔리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몸은 뜨거워진다. 물 한 동이를 다 끼얹고는 선 채로 수도꼭지를 머리 위에다 틀어 놓는다. 차가운 물이 흘러내리면서 기분이 상쾌해진다.

나는 작은놈 방에 있는 선풍기까지 마루로 가지고 나와서 임꺽정을 다시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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