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장으로 피난을 가다

  • 입력 2008.07.26 13:28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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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도저히 몬 살겠다. 피난 좀 갔다가 오자.”

오전 9시쯤에 복숭아를 공판장으로 실어 보내고 예취기로 풀을 베느라 땀범벅이 되어 나오는데 재락이 형이 마당가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다 피난을 가자고 한다. 발발이라도 한 마리 잡아 골 깊은 ‘기룡산 아래 보현 삼십 리’ 어디에라도 가느냐고 물으니까 공판장으로 가잔다.

에어컨 시원하게 틀어 놓은 농협공판장 식당으로 피난을 가서 맥주나 마시자고 한다. 그렇게 말 할만도 하기는 하다. 온도계를 들여다보니 삼십 오도나 올라가 있다. 지독하게 덥다. 삼 삶듯 온몸을 푹푹 삶아댄다. 한 삼십 분 전에 내다 놓은 물이 미적지근하게 식어 한 사발을 마셔도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는 못한다. 땀은 계속해서 줄줄 흘러내린다.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내 기색을 살핀 재락이 형이 등을 떠민다.

“방수처리를 해야지 안 되겠다. 빨리 씻고 나온나. 중환이, 병도, 동현이, 주환이 형까지 다 거 있단다.”

나는 망설인다. 피난을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밀린 원고가 생각을 붙들어 맨다. 상자를 엎어 그 위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문다. 힘든 노동 뒤의 담배 맛이 온몸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 마약을 하면 이런 기분이 될 것인가?

“아따, 골프를 쳐도 되겠다. 우예 저래 예쁘게도 깎았노.”

재락이 형이 주저앉아 복숭아밭을 바라보며 감탄을 한다. 나는 깊이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풀을 벤 복숭아밭으로 눈길을 준다.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풀밭이 참 곱다. 그 위에 드러누워 한숨 자고 싶다. 그러나 보기에 좋은 것도 오늘 뿐일 것이다.

내일쯤이면 잘려나간 풀이 마르고 기세 좋게 풀끝이 삐죽삐죽 치밀어 올라 올 것이다. 대충 씻고 공판장으로 가는 사이에 차 에어컨이 몸을 제법 식혀준다. 공판장 마당에 들어서서 차에서 내리니 시멘트 바닥의 열기가 맹렬하게 온몸을 휘감는다. 아직 경매가 진행 중인데도 더위 탓인지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를 않는다.

“집에 가마 있어도 통장에 돈 들어갈낀데 이 더위에 말라꼬 돈 찾으로 오는기요.”

외무를 하는 정백이가 한 손에 수북한 돈 봉투를 들고 어깨를 툭 친다. 재락이 형이 돈 봉투를 쥔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놓으며 한 소리 한다.

“이 날씨에 기곈들 더위를 안 묵겠나. 그 기계를 우예 믿노.”

식당으로 들어서니 여느 날과는 달리 사람들이 별로 없고 우리 마을 사람들만 한 자리에 앉아 부산하게 떠들고 있다. 중환이가 옆의 빈 의자를 당겨주며 빈정거린다.

“야, 이 날씨에 풀을 빗다꼬? 니 죽을라고 환장을 했나.”

맥주잔을 건네며 동현이도 한 소리 거든다. 나는 서서 술을 받으며 에어컨 바람을 온몸으로 끌어들인다. 꼬들꼬들 말라가던 몸이 비로소 생기를 찾는다.

“일, 살살 해라. 저 위에 경주 형님 죽는 거 바라. 새빠지게 해바야 니만 손해데.”

경주 형님은 지난봄에 아픈 소문 하나 없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어느 날 저녁답에 속이 안 좋다며 ‘녹전 카페’에 까스명스를 사러 왔다 간 그 저녁에 죽고 말았다. ‘녹전 카페’에서 산 까스명스는 마시지도 못하고 손에 쥔 채 눈을 감았다는 말이 떠돌았다. 까스명스 사러 가는 동안에 병원에만 갔더라도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사람들은 쑤군덕거렸다.

병도 형이 맥주 네 병을 불러 돈 만 원을 계산한다. 중환이는 자기가 살 차례라며 말리지만 계산은 끝나버렸다. 나는 맥주 두 잔을 숨도 쉬지 않고 들이켠다.

“아따, 사답에 물 들어가는 거 바라. 마이 가물었구나. 욕 봤다, 한잔 더 받어라.”

병도 형이 맥주병을 들고 기다렸다가 잔을 가득 채운다. 맥주는 금방 바닥이 나서 중환이가 네 병을 사고 주환이 형도 네 병을 산다. 안주는 고추장에 멸치, 청량고추와 양파 썬 것에 된장이 만포장으로 나온다.

가끔 상차반들이 물을 마시려고 들어왔다가 우리 자리 맥주로 목을 축이고 나가고, 짐을 다 실은 상인들이 잔치국수로 요기를 하느라 들락거릴 뿐 식당은 녹전 사람들 천국이다. 맥주 네 병을 사는 순서가 마지막 내 차례로 돌아왔을 때에는 재락이 형이 모처럼 이렇게 만났는데 어디 가서 고스톱 한 판 붙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슬슬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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