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체험 왔다, 효도를 배웠습니다

[ 한국농정신문 창간 20주년 기획 ] - 충북 진천 관지미의 1년 #21

  • 입력 2020.05.24 18:00
  • 수정 2020.05.24 20:18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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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신옥순 할머니댁의 모내기 날엔 손주딸의 자녀들까지 4대가 모였습니다. 신옥순 할머니의 손주사위 노지완씨(오른쪽)와 손주 신중언씨(가운데)가 이앙기에 적재할 모를 나르고 있습니다. 기계 작업은 이앙기를 가지고 있는 산 너머 당골마을 이웃 신동권씨(왼쪽)에게 부탁했습니다.
신옥순 할머니댁의 모내기 날엔 손주딸의 자녀들까지 4대가 모였습니다. 신옥순 할머니의 손주사위 노지완씨(오른쪽)와 손주 신중언씨(가운데)가 이앙기에 적재할 모를 나르고 있습니다. 기계 작업은 이앙기를 가지고 있는 산 너머 당골마을 이웃 신동권씨(왼쪽)에게 부탁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날, 도시는 점점 팽창하고 농촌은 몰락해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국농정>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려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30년을 도시에서만 자란 청년이 1년 동안 한 농촌마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공유하며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자 합니다.

못자리를 마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제법 자라 모내기를 할 때가 됐다고 하니 농번기의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논 있는 어르신들이 일제히 모내기에 나서는 시기, 이번에는 오랜만에 신옥순(93) 할머니 댁을 찾아 모내기의 과정을 체험해봅니다.

 요즘 관지미는 주로 주말이나 휴일에 내려가게 됩니다. 저번의 못자리 일정도 그랬지만 어르신들이 자녀들의 주말 방문에 맞춰 큼직한 농사일정을 잡으시기 때문인데요. 오늘 모내기 체험을 위해 두 번째로 방문하는 신옥순 할머니 댁에도 증손주까지 포함해 아홉 식구가 찾아왔습니다. 이 집의 논농사는 이제 사실상 할머니의 자식과 손주들이 이어서 짓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작업을 시작한다는 아침 7시까지는 맞춰 도착했는데, 감사하게도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가 바로 붙잡혀 아침을 얻어먹는 바람에 출근은 살짝 늦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논 5,000평 중 댁에서 조금 떨어진, 이장님 수박하우스 옆 세 필지에서 먼저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할머니 댁에는 모 심는 기계인 이앙기가 없기 때문에, 마을 뒷산 너머 당골마을에 사는 신동권씨가 트럭에 이앙기를 싣고 와서 오늘 작업을 돕습니다. 신씨는 할머니의 남편 고 신용달 옹이 살아계셨을 때부터 죽 이 집의 농사를 기계로 도왔다고 합니다.

작년 가을 추수를 지켜보며 콤바인의 중요성을 깨달았었는데요, 이앙기 역시 논농사 기계화의 한 축을 이루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마르고 거친 땅에서도 안정적으로 전진하기 위해 무한궤도를 장착한 콤바인이나 대형 타이어를 갖춘 트랙터와는 달리, 이앙기의 바퀴는 갯벌처럼 질은 논바닥에 쉬이 빠지지 않으면서도 이미 심어둔 모를 상하게 하지 않도록 매우 얇은 두께의 톱니바퀴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뒤에는 이앙부라고 하는 거대한 널빤지가 있어 모판에서 떼어낸 모 뭉치를 주입해 소모하는데, 이것이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를 아래쪽으로 떨어뜨리면 식부암이라고 하는 기계팔이 모를 잡아 땅에 꽂는 운동을 하며 모를 심습니다. 못자리용 모판은 안쪽을 자세히 보면 칸칸으로 공간이 구분돼 있는데, 애초 이앙기가 옮겨 심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신씨의 이앙기는 6조니까, 사람이 걷는 속도로 한 번에 여섯 개씩 모를 심을 수 있습니다. 인력으로 따지자면 모르긴 해도 수십 명이 동시에 작업하는 것과 비슷한 속도를 기계 하나로 내는 셈이지요. 기계 값도 품삯도 콤바인보다는 상당히 싼 편인데, 마지기당 2만5,000원 선이라고 합니다. 콤바인은 6만원이었죠.

“어머니가 안 지으신다고 하면, 나는 이거 안 지어.”

장남 신경재씨가 삽으로 흙을 퍼 물이 많이 고인 논 한쪽에 던지길 수십 차례 반복합니다.
장남 신경재씨가 삽으로 흙을 퍼 물이 많이 고인 논 한쪽에 던지길 수십 차례 반복합니다.

장화를 신고 논에 들어가 열심히 삽질을 하고 있는 신경재씨가 사진을 찍는 제게 소리칩니다. 아마 제가 왔으니까 솔직히 해주시는 말씀이겠죠. 물이 많이 고인 부분에 모가 잘 심기지 않을까 우려해 흙을 퍼 던지는 그의 나이도 이제 70을 넘었습니다. 본래 모내기 전에는 물이 일정하게 고일 수 있도록 트랙터에 써래를 달아 땅을 고르며 준비작업을 하는데요, 그가 낡은 트랙터를 몰고 써래질을 했음에도 물길과 가까운 부분엔 물이 고였고, 이런 일에는 역시 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머니의 둘째아들 신원재(67)씨와 저는 이앙기가 모를 충전하러 농로로 올 때마다 모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땅에 놓인 모판을 들어 올리는 과정이 꽤나 고단한 일임을 못자리 때 알았기 때문에 고민 없이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저기 산 중턱에 물길 하나 보이죠? 물을 퍼 올려서 저기서 다시 흘려 물을 대는 거에요.”

그러고 보니 관지미는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촌락의 이상적인 입지를 이야기할 때 최고로 꼽는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네요. 마을 뒤쪽에는 100m 높이 정도의 봉우리를 가진 이름 모를 야산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 할머니의 자녀들은 어렸을 적 두 봉우리 사이에 난 길로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신원재씨가 가리킨 그 산자락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길 다란 구조물이 하나 보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농번기가 되면 펌프로 근처를 흐르는 미호천에서 물을 퍼 올린 뒤 다시 내려 보내 농지에 공급하는데, 바로 그 물이 흘러 내려오는 길입니다.

못자리를 할 때도 그랬지만 이쯤에서 다시 벼농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겠습니다. 농지에 물을 채운 상태(논)로 벼를 키우는 이유는, 물을 아주 좋아하고 또 내성도 강한 벼의 특성을 이용해 잡초의 성장을 막기 위함입니다. 토양을 완전히 물로 덮어버리면 대부분의 잡초가 자라지 않아 풀을 매는데 드는 엄청난 노동력을 절약하면서도, 양분이 집중된 벼는 더 많은 수확량을 선사하겠죠. 이 방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제가 한달 전 경험했던 ‘못자리’입니다. 좁은 면적에 집중적으로 파종한 후 뿌리가 어느 정도 자라면 물을 얕게 채운 논에 옮겨 심는 것이죠.

그래서 저기 움직이고 있는 기계의 이름도 이 방법을 칭하는 ‘이앙(移秧, 모를 옮기다)법’에서 왔습니다. 사실 심는 작업을 기계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벼농사만이 누리는 엄청난 축복이기도 한데요, 이제 이앙기가 없는 벼농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밭으로 가면 파종을 기계로 하는 비중은 아직도 약 10%에 불과합니다. 사람 손이 없으면 대부분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셈이죠. 이처럼 벼농사의 전 과정이 100%에 가깝게 기계화가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우리 민족의 주식을 생산한다는 그 큰 위상 덕에 관련 기술 개발과 지원이 최우선적으로 이뤄진 덕이 크다 하겠습니다. 비록 사람이 손으로 밀어야 하긴 했지만, 이앙기 자체는 이미 197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방법은 벼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시점에 물을 공급하지 못하면 농사가 말 그대로 폭삭 망해버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앙법이 벼농사의 정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그나마 예전보다는 토목 기술이 발달한 조선 후기나 돼서였고, 그전에는 다른 작물들처럼 처음부터 직접 심었다고(직파) 전해집니다. 예를 들면 지금도 논이 없는 제주에서는 직파법으로 ‘밭벼’가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앙법이 자리를 잡았어도 논까지 흐르는 물길이 완벽하게 마련되기 전까지는 안정적인 생산이 쉽지 않았습니다. 신원재씨가 어렸을 때만 해도 물을 안정적으로 댈 수 없었기 때문에, 가뭄으로 인해 종종 지독한 흉년을 겪었다고 합니다.

둘째아들 신원재씨가 모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힘겨워 보입니다. 할머니의 자녀들도 이제 노년이 됐습니다.
둘째아들 신원재씨가 모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힘겨워 보입니다. 할머니의 자녀들도 이제 노년이 됐습니다.

“그 때만해도 이렇게 물을 대는 시설이 없었어요. 그래서 논에 물을 유지할 방법은 비로 채우는 것 말고는 없었죠. 오래 가물면 논이 말라서 벼가 말라 죽기 일쑤였어요.”

지금은 어지간한 재난이 닥쳐도 쌀값이 조금 비싸질지언정 밥을 못 먹을 걱정은 없지만, 반세기 전만해도 농사가 안 되면 전 국민이 쌀이 모자라 안달이 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신 할머니 댁에 처음 인사를 드릴 때도 신경재씨로부터 먹을 것이 없어 어린시절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자세한 이유를 오늘 듣게 됐습니다.

오래 전부터 쓰인 문전옥답(門前沃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 바로 앞의 논을 빗대 아주 귀한 재산을 일컫는 말인데, 그만큼 사는 집 바로 앞의 농지를 값진 존재로 여겼다지요. 농지 구하기가 어려운 요즘은 농민들에겐 더욱 와 닿는 표현일 것입니다. 남은 두 필지는 그 말대로 할머니 댁에서 문만 열면 바로 보이는 곳인데요, 관지미 주민들이 농사짓는 논은 대개는 아무리 멀어도 마을의 영역 안에 있지만 마을길에 붙은 이 필지들은 특히나 자리가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곳을 지날 때면 지난해 여름 관지미에 처음 왔을 적, 제법 자란 초록빛 벼들 사이로 잡초가 불쑥불쑥 튀어나와있던 모습이 생각나곤 합니다.

이쪽에선 신경재씨를 따라 모내기를 도우러 온 그의 사위 노지완(45)씨와 아들 신중언(28)씨가 모판을 가져다 놓고 이앙기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앞서 세 필지에서는 주관적으로 생각해도 확실히 두 선생님의 고생을 덜어드렸다고 자신하는데요, 여기서는 상황이 조금 달랐습니다. 노씨가 거듭 만류하기도 했지만, 이미 자리 잡은 두 청년의 존재로 할 일이 사라진 저는 땀 깨나 뺐던 아까와는 달리 머쓱하게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앙기에 모를 내 주고 땅에 떨어지는 빈 모판을 주워 나르는 수고를 좀 덜어줄 뿐이었죠.

대신 사진 찍을 여유가 조금 더 생겼고, 이앙기가 다시 논으로 떠날 때마다 생긴 쉬는 시간에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도시에 사는 손주들이 모내기 때마다 와서 일을 돕는다니, 할머니께서 ‘늙은 지금에야 더 복 받았다’고 말씀하셨던 이유를 새삼 알 것도 같습니다. 할머니를 비롯해 집에 계셨던 분들이 차려주신 밥을 먹고 한 시간 반 정도를 더 일하니, 겨우 반나절 만에 5,000평 모내기는 끝이 납니다.

이날 작업 도중, 모가 판 밖으로 삐져나와 이앙기에 넣을 수 없었던 불량 모판이 하나 나왔습니다. 논두렁에 그냥 버려두자니 할머니가 발견해 손으로 심는다고 고생하실까, 본능적으로(?) 염려된 아들들이 이를 애써 처리하는 모습이 강한 인상으로 남습니다. 곧 둘째 아드님의 자녀가 결혼식을 한다는데 그 때쯤 있을 감자 캐는 일정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잠시 잃기도 했습니다.

사실 할머니의 자녀와 손주들은 하나 같이 도시에서 잘 자리 잡았고, 더 이상 주말을 반납해가며 굳이 힘들고 번거로운 이 일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부터 열 식구면 열 식구를 다 먹여 살린 이 땅과 이 농사가 할머니껜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고 있기에 올해도 농사를 치러내는 것이죠. 쌀농사를 배우러 올 때마다 자식 된 도리에 대해 깊은 가르침을 얻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앙기를 모는 신동권씨 뒤로 김상만 노인회장님 댁 일가족이 모내기를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모가 살짝 모자라면 다른 집에 가서 바로 얻어오기도 합니다. 올해는 이 집의 모가 살짝 모자라 김상만 노인회장님 댁 것을 몇판 얻어왔는데, 작년에는 반대였다고 하네요.
이앙기를 모는 신동권씨 뒤로 김상만 노인회장님 댁 일가족이 모내기를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모가 살짝 모자라면 다른 집에 가서 바로 얻어오기도 합니다. 올해는 이 집의 모가 살짝 모자라 김상만 노인회장님 댁 것을 몇판 얻어왔는데, 작년에는 반대였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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