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사과꽃 필 무렵

  • 입력 2020.05.10 18:00
  • 기자명 최외순(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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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외순(경남 거창)
최외순(경남 거창)

새벽녘 안개가 산허리를 둘러 고요하게 가두고 있을 때 즈음 의식이 깨기도 전, 몸은 작업복을 걸치고 애써 빠질라, 장갑에 모자를 챙기며 미처 깨어나지 못한 머리를 흔들며 그렇게 밭으로 나간다.

잠든 막둥이의 밝은 귀에 걸릴라 현관문을 조용히 닫고 바쁜 걸음을 총총대며 탄 트럭은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고 고이 모여 있는 안개를 흩트려 깨운다.

어둠이 금방 지나간 이 무렵은 죽은 듯이 고요함 속에서 맑은 산새소리와 단잠을 뺏긴 피곤한 숨소리가 부조화를 이루며 밤새 비에 흠뻑 젖은 꽃잎은 겨우 나무에 매달려 있다. 산속 가운데 사과밭은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어느 단락처럼 다소곳한 모습이다. 둘러싼 산 어귀에서 숨 가쁘게 울어대는 투박한 뻐꾹이 소리, 안개인지 물인지 밤새 잠겨있었던 것 만 같은 흰 분홍 사과 꽃의 형상.

오늘 새벽 사과밭 꽃 솎기 작업하며 내 낭만의 정서를 쏟아가며 떠올린 재미없는 몇 글귀이다. 오락가락 하는 날씨 덕에 이제야 꽃 솎기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주 서리와 냉해, 이번 주 갑자기 찾아온 더위 그리고 비까지 보탠 덕에 사과 꽃은 미처 다 피기도 전에 산전수전 겪은 모양새다.

코로나19 이후로 삶의 방식이 바뀔 것이라고 한다. 무엇부터 바꿀 수 있을까.

거창 로컬푸드협동조합에서 일을 하면서 먹거리를 생산하는 과정과 밥상의 거리가 멀어져 있음을 많이 느끼게 된다. 농업의 구조적인 문제도 많지만 먹거리 선택에 있어서 사실 소비자의 심리적 거리도 한 몫 한다. 단적으로 친환경을 선호하지만 흠집이 있거나 작은 것을 싫어하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놀라울 것도 없다.

농사과정의 고됨과 농사가 노력, 기후 등 여러 조건에서 이루어짐을 알지만 당도가 약하거나 식감이 떨어지면 무참히 고개를 돌리거나 항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소비자의 모습이다. 여기다 으레 로컬푸드 직매장, 꾸러미사업 등을 바라보는 시각은 “품질 좋은 농산물을 착한 가격으로….” 이렇게 설명을 붙인다. 농사를 지어본 특히 중소농가는, 농민은 이 대목에서 가슴 치는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농민도 환경을 생각하는 농사를 짓고 싶다. 그렇다면 예쁜 것, 당도가 좋은 것, 크기가 균일한 것만 찾는 소비의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

‘좋은 먹거리’에 대한 생각이 변화해야 되는 대목이다. 맛은 단맛, 쓴맛, 신맛 등이 있다. 오직 당도에 기대어, 색깔과 크기의 균일함으로 평가하는 이상 생산자가 바뀌기는 힘들다. 사과꽃 필 무렵을 기억해야 하는 건 기후가 이쯤 되면 농민이 노력을 해도 크고 좋은 사과가 많이 나올 리가 없다.

좀 못생기거나 다소 맛이 떨어진다고 해도 기후변화에 따른 고난으로 시작하는 농민의 애타는 심정과 수확기까지 땀과 정성을 쏟아낼 농민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사과 꽃 필 무렵. 사과가 고생이 많았지” 그렇게 기억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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