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은 냉해, 농민은 냉가슴
배꽃은 냉해, 농민은 냉가슴
  • 권순창 기자
  • 승인 2020.05.03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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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지난달 27일 전남 나주시 봉황면 옥산리 배밭에서 한 농민이 냉해를 입어 검게 시들어버린 배꽃을 살펴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달 27일 전남 나주시 봉황면 옥산리 배밭에서 한 농민이 냉해를 입어 검게 시들어버린 배꽃을 살펴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나뭇가지에 하얗게 내려앉았던 배꽃이 지고 나면 꽃이 있던 자리마다 몽글몽글 열매가 들어박힌다. 나무들이 콩알 만한 열매를 빼곡이 맺기 시작하는 지금이야말로 농민들에겐 꽃 피는 춘삼월보다 더 황홀하고 흐뭇한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3월말부터 4월초에 걸친 이상 저온현상이 농민들의 즐거움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갑작스런 추위를 견디지 못한 꽃들은 고사해버렸고, 살아남은 꽃들도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다. 몇몇 농가의 문제가 아니라 과수 주산지 전반에 걸친 대규모 피해상황이다.

“여기(1,200평)가 원래 봉지 3만개 이상을 싸야 하는 밭인데 3,000개도 못쌀 것 같아요.” 노봉주씨는 최근 꾸려진 나주 배 냉해피해 비대위의 집행위원장이다. 정상적으로라면 한 다발마다 6~8개씩의 열매가 맺혀 있어야 하는데 노씨의 밭에선 2개 이상을 보기가 어렵다. 그나마 힘들게 맺은 열매들도 한쪽이 검게 썩었거나 찌그러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건 커 봐야 공판장에서 1만원(15kg)밖에 안 나오죠. 평균 단가가 2만4,000원은 돼야 수익이 나는데, 가능성 있는 배들이 안 보여요. 올핸 50% 정도 피해 봤으면 다행이라고 하는데 그런 농가도 전체의 3할이 안되고, 여기처럼 90% 피해 본 곳도 많아요.”

노씨의 표정이 더욱 착잡한 이유는 이 참담한 피해를 보상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 대책은 형식적인 농약대 지급에 그치고, 농협에도 그 이상의 지원을 기대하긴 어렵다. 남은 건 농작물재해보험인데, 재해보험이 농민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번 냉해부터는 더더욱 정상적인 보상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과수 적과 전 재해보험 보상률이 올해부터 80%에서 50%로 대폭 삭감됐기 때문이다. 노씨의 경우 8,000평 과원이 모두 피해율 100%를 인정받는다 해도 최대 6,000만~6,500만원의 보험금 수령이 가능하다. 평시 연 매출액이 2억원 정도니 매출액의 3분의1도 안되는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보상률 50%에 자부담 20%를 제하면 30%만 받는 거에요. 보험을 넣긴 했는데 어처구니가 없는 거죠. 보험제도는 도저히 이해 안가는 부분이 많아요.”

가장 큰 문제는 기후변화로 인해 재해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 겨울 기온이 따뜻해 개화시기가 앞당겨졌고, 이에 과수농가들이 연례행사처럼 냉해를 겪고 있다. 하지만 유일한 재해 대응책인 보험은 보험사 부담을 덜고 농민 부담을 더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대책의 부재는 산업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노씨를 비롯해 나주지역의 적지 않은 배 농가들이 최근 심각하게 폐원을 고려하고 있다. 당장 올해 영농의욕 저하로 과원 방치 사례가 늘어나면 병충해 확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품목 전환으로 인한 도미노식 수급불안과 자급률 붕괴의 후폭풍이 뒤따를 수도 있다.

정부가 농작물 재해대책을 보험에 내맡긴 지 어언 20년. 보험은 과연 재해로부터 농민들의 안정적인 농업을 보장하고 있는가. ‘보험의 현실화’, ‘정부의 책임있는 재해대책’. 매번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똑같은 구호를 필사적으로 부르짖고 있는 농민들을 이제는 정부가 진지하게 마주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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