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밤섬 배 목수③ 율도조선소 견습 목수 입문기

  • 입력 2020.04.26 18:1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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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일제 강점기였던 1938년의 어느 봄날, 한강 밤섬의 배 만드는 공장(조선소)에 열아홉 살짜리 견습공 하나가 처음으로 출근하였다. 이 신출내기 견습공이 쭈뼛거리며 작업장으로 들어섰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목수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나무를 나르고 톱질을 하고 못질을 하는 등 제 할 일에 바빴다. 이윽고 이 청년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차렷 자세를 하고는 큰 소리로 또박또박 외친다.

-저는, 배 짓는, 목수, 기술을, 배우려고, 온, 방년, 19세, 이봉수, 라고, 합니다!

그 때에야 작업 중이던 사람들이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고는 짧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어가더니, 다음 순간 여기저기서 주문이 날아들었다.

-뭣하고 있어, 저기 있는 나무판자, 이쪽 상판 위로 끌어 올리지 않고!

-저기 가서 먹통하고 톱 가져오라는 소리 안 들리나!

-이군아, 연장통에서 대패하고 끌 찾아갖고 와라!

-이봉수! 셋 셀 때까지 피새 못 대령하지 않으면 한강물에 던져버릴 거야! 하나, 두울…

날랜 몸놀림으로 뛰어다니며 목수들의 거추꾼 노릇을 척척 해내던 이봉수의 동작이 ‘피새 못 가져오라’는 대목에서 딱 멈췄다. ‘피새 못’은 참나무를 깎아 만든 나무못이다. 그 나무못 박을 자리에다 미리 파둔 구멍을 ‘피새 구멍’이라 한다. 이봉수는 출근 첫날 한 시간도 안 돼서 벌써 귀한 것 한 가지를 배웠다. 이봉수의 배(船) 목수 견습공 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강 밤섬에 있던 그 공장의 공식 명칭은 ‘율도조선소’였어요. 우리가 돛단배라고 부르는 풍선을 전문으로 만드는 조선소였지요. 내가 들어갔을 때 30명의 목수가 있었고, 나처럼 기술을 배우려고 찾아온 견습생들이 20여 명이나 됐거든요, 그 견습생들은 기술을 배우는 3년 동안 급료는커녕 끼니도 제공받지 못 했지요. 밥도 집에서 먹고 다녔고요.”

당시 율도조선소에서 주로 제작하던 돛단배는 고구려 적부터 전래 돼온 ‘한선(韓船)’이었다. 하지만 이봉수가 견습생으로 들어갔던 그 시기만 해도 주문하는 선주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신에 어부들은 ‘하시키’라는 이름의 일본식 목선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일본식 목선 하시키는 이물(船首, 배의 앞머리)이 뾰족해서 바람이나 파도를 잘 헤치고 나가도록 돼 있지만, 한선은 이물이 네모로 돼 있고 밑바닥이 평평해서 더 안전한 대신에,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 단점이었지요. 모양이 마치 두부모처럼 네모져서 잘 나가지 않았어요.”

이리저리 바삐 쏘다닐 필요가 없던 옛 시절에는 속도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전통 한선의 생김새에서 유유자적했던 우리 조상의 넉넉함을 읽을 수 있다면…그것이야 뭐,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외지에 출타했다 돌아온 조선소 소장이 작업장에 나타나서는 새로운 일거리를 소개한다.

“잠깐, 작업 멈추고 여기 주목! 행주나루에 사는 김 사장한테서 서른다섯 자짜리 한선 한 척을 급히 지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동안 해오던 일을 빨리 마치고 적어도 사흘 뒤부터는 한선 건조 작업에 바로 착수하도록 해!

율도조선소 소장이 한선 한 척을 지어내라고 지시했다. 그럼 이제부터, 전통 목선인 한선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건조되었는지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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