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자리 했으면 논농사 절반은 끝난 거야”

[한국농정신문 창간 20주년 기획] - 충북 진천 관지미의 1년 #19

  • 입력 2020.04.26 18:00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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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오늘의 주인공 김상만 노인회장님이 갓 싹이 난 모판을 트럭에서 하우스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김상만 노인회장님이 갓 싹이 난 모판을 트럭에서 하우스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날, 도시는 점점 팽창하고 농촌은 몰락해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국농정>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려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30년을 도시에서만 자란 청년이 1년 동안 한 농촌마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공유하며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자 합니다.

입춘을 보낸 지 두 달, 날은 이제야 봄이 된 것 같습니다. 평소라면 늦은 시간까지 딱 좋은 이불 속 온도를 즐겼을 일요일, 저는 새벽부터 차에 시동을 걸고 목적지에 관지미를 찍어봅니다. 오늘은 김상만 노인회장님 댁이 ‘못자리’를 하는 날이니까요.

일요일 이른 오전, 비어있다시피 한 고속도로를 달려 노인회장님 댁에 도착하니 늘 두 분만 계셨던 작은 집이 오늘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큰 딸과 그 사위, 둘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청소년 두 자녀, 거기에 셋째 딸 부부까지 총 열 명이나 되는 대가족입니다.

노인회장님은 자녀들이 오기 전 이미 일을 시킬(?) 준비를 마쳤습니다. 못자리를 위해 육묘장에서 가져올 모판은 총 천여 장. 이 중 트럭 한 대 분을 미리 실어 집에 가져와 뒀습니다. 당연히 모판 밑에 깔 비닐 등 각종 농자재도 준비해두셨고, 트럭이 지나갈 하우스 옆 논은 트랙터로 미리 길을 내 바퀴가 헛돌지 않게 하는 등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탭니다. 이따 쓰겠지만 못자리를 끝내고 오후에 시킬 일도 있습니다. 그 준비까지 다 해놓으셨죠.

“장인어른 까다로우셔서, 일 잘해야 해요(웃음).”

결혼한 뒤 한해도 빠짐없이 못자리며 모내기·추수에 각종 밭일까지, 처가 농사일 도운 경력이 20년이 넘는다는 첫째 사위 최윤성씨가 노인회장님의 직업정신을 강조합니다. 모판들이 예쁘게 정렬되도록 하우스 양 끝에 끈 달린 말뚝을 박아 미리 선까지 그려놓는 것을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혼했어요?”

“아직 안했습니다.”

“처가가 농사짓는 곳으론 장가가지 마세요.”

성실하고 과묵한 둘째 사위 배정만씨와 이날 나눈 대화는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쉬지 않고 계속 모판을 내려놓는 아들 김의섭씨를 비롯해 두 사위 분들의 품앗이 경력은 사실 굳이 여쭤볼 필요가 없는 수준으로 보였습니다.

작업이 막 시작되는 순간.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시는 할머니와 두 딸을 합해 도합 7명의 식구가 집안의 못자리를 위해 모였습니다.
작업이 막 시작되는 순간.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시는 할머니와 두 딸을 합해 도합 7명의 식구가 집안의 못자리를 위해 모였습니다.

모판 실은 트럭을 하우스에 붙이고, 그 옆으로 저희는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한 사람이 트럭에서 모판을 꺼내면 그것을 받아 하우스까지 전달합니다. 이 중 가장 힘든 사람은 트럭 위에서 시시각각 그 높이가 달라지는 모판을 꺼내는 사람과, 최종적으로 이를 받아 허리를 굽혀 하우스에 내려놓는 사람이 됩니다. 중간에 선 저는 처음엔 별로 힘든 줄 몰랐는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팔을 안쪽으로 굽히기 어려운 지경이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상토와 볍씨를 채우고 육묘장에서 물을 먹여 둔 모판의 무게는 10kg에 육박한다고 하네요.

“한 기자, 자동변속기 달린 트럭 10년 전에도 있었나? 얼마쯤 해?”

논 1만평을 다 채울 모판을 전부 받아오려면 두 번 더 왕복해야 한다고 해 육묘장 구경도 할 겸 트럭에 동승했습니다. 2000년식이라는 노인회장님의 1톤 트럭은 낡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이제 운전자의 나이가 일일이 클러치를 밟고 맞는 기어를 넣어가며 변속을 하기엔 부담스러운 지점에 도달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아까도 조금 가파르다 싶은 턱을 넘어 논으로 들어갈 적에 클러치 조작이 세밀하지 못했는지 시동이 꺼지기도 했죠.

워낙 활동적인 노인회장님 부부는 이 마을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얼굴들이기에 사실 저로선 종종 그 연세를 잊곤 합니다. 얼마나 더 쓸 수 있을지 모르니 10년쯤 된 걸 찾아보려 한다는 말씀이 새삼 서글프게 들립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스마트폰을 달고 사는 젊은이를 데려온 덕에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궁금증을 해결했다는 것이겠죠. 저도 덩달아 500만원이면 자동변속기가 달린, 농촌에서 쓸 만한 트럭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옆동네 신월리의 벼 육묘장은 꽤나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거대한 단동 하우스에는 모판이 여기저기 대량으로 쌓여있고, 논과 하우스 사이에는 마치 기찻길처럼 생긴, 모판을 자동으로 편리하게 옮길 수 있는 철제 레일도 보입니다. 전에 채소 모종을 다루는 육묘장을 가본 적이 있었는데, 역시 벼는 육묘 단계에서도 기계·자동화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부모님과 함께 육묘장을 운영하고 있는 채희권씨는 우리가 도착하자 노인회장님 댁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모판 덩어리를 지게차로 실어다 줍니다.

옆동네 신월리의 한 육묘장에서 일하는 채희권씨가 지게차로 노인회장님의 트럭에 모판을 실어줍니다.
옆동네 신월리의 한 육묘장에서 일하는 채희권씨가 지게차로 노인회장님의 트럭에 모판을 실어줍니다.

“농가 수로는 잘 모르겠고… 나가는 모판 수로 보면 올해는 6만 장 정도 될 것 같아요.”

모판 1,000장이 논 1만 평 정도를 채운다고 하니까, 요 육묘장에서 키운 볍씨만 60만평 분량이 됩니다. 관지미에서 쌀을 생산하시는 분들은 대개 1만 평 정도를 짓는 중소농들이니, 이런 분들 기준으로 농민 60명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생산량이죠. 개인이 운영하는 규모론 제법 큰 수준이라고 합니다.

모판은 노인회장님이 받는 것처럼 싹만 틔워서 공급하면 판당 1,000원인데, 바로 모심기가 가능한 수준까지 육묘장에서 5월까지 키워서 주면 가격이 세배가 된답니다. 다른 곳과 다르게 이 육묘장은 키워 나가는 모판이 전체의 10% 정도로 그리 많지 않은데, 주로 규모가 작고 인력을 많이 쓰기 어려운 농가에서 그렇게 주문을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관지미에선 신옥순 할머니 댁이 모를 그렇게 받고 있죠.

“왜냐하면 집에 일꾼이나 식구가 있거나 하면 이렇게 (노인회장님 댁처럼)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말하자면 인건비 가격인거죠.”

그러니 사실 오늘 제가 체험한 못자리는, 벼를 재배하는 농민이 스스로 볍씨도 뿌리고 모판을 채우며 모든 과정을 준비하는 ‘완전체’는 아닙니다. 정확히 못자리라고 하면 볍씨와 상토를 채운 모판을 논에 내려놓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앞서 싹을 틔우는 첫 과정이 생략된 셈이죠. 그러나 가장 번거로운 첫 단계를 외주로 주는 이 방법은 관지미를 넘어 현재 농촌의 주류라 봐도 무방합니다. 고령화와 인력 부족이 겹친 농촌의 현실을 드러내는 수만 가지 풍경 중 가장 대표적인 예시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놀랍게도 부부 댁은 2년 전까지만 해도 가족들이 모두 나서 못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해결했다고 합니다.

삼각대를 두고 제가 일하는 모습을 찍어봤습니다. 가장 힘든 위치에 노인회장님의 아드님과 사위 두분이 계시네요.
삼각대를 두고 제가 일하는 모습을 찍어봤습니다. 가장 힘든 위치에 노인회장님의 아드님과 사위 두분이 계시네요.

다시 하우스로 돌아와 모판을 나릅니다. 트럭에서 먼 하우스 왼편 절반부터 모판을 채웠기 때문에, 오른편을 채우기 시작할 땐 모판을 날라야 할 거리가 줄어 인력이 남습니다. 며느리가 집으로 들어가고, 두 자녀도 사실상 교대로 거드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강창성 할머니와 두 따님도 원래는 나오려 했지만 제가 온 덕에 집에 계실 수 있었다고 하니(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약간의 뿌듯함도 느낍니다. 막판엔 첫째 사위 분과 교대해 모판을 내려놓는 역할을 맡았는데, 덕분에 잠깐 뿐이었는데도 집에서 앓을 근육통에 허벅지 안쪽도 추가됐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달려든 덕에 점심 먹기 전에 모판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작업이 끝난 뒤에는 모판들 위로 천을 덮어주고, 문을 닫은 뒤 하우스 천장에 달린 스프링클러로 물을 줍니다. 이제 5월 중순까지 살피며 기다려주면 모내기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모가 자라게 됩니다.

“나 데리고 가서 일하면 굼뜨니 답답해 죽지. 저 양반 애들 온 김에 시킨다고 대추나무 밭 작업도 다 준비해놨어.”

못자리 끝났으니 논농사 절반은 끝났다며 좋아하시는 강창성 할머니는, 자식들 온 김에 할아버지가 다른 작업도 준비해놨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에 계셨던 분들이 차려주신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니, 트럭에 관리기를 싣고 마을 뒤편의 또 다른 밭으로 간답니다. 따라가 보니 작년에 죽은 대추나무를 새로 키우신다고 이미 여섯 줄로 새로 묘목을 심어두셨습니다. 이 밭은 관지미를 처음 들어올 때 만났던 서울여대 농활대 학생들이 풀을 뽑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바로 그곳인데, 올해는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아예 검정색 부직포를 덮어 풀이 자라는 것을 막겠다고 하시네요.

오후 대추나무밭 가꾸기 일정에선 순식간에 밭을 갈아엎어 부직포를 덮어버리는 관리기의 위력도 눈으로 접합니다. 하지만 기계가 있어도 사람 대여섯은 필요하네요.
오후 대추나무밭 가꾸기 일정에선 순식간에 밭을 갈아엎어 부직포를 덮어버리는 관리기의 위력도 눈으로 접합니다. 하지만 기계가 있어도 사람 대여섯은 필요하네요.

노인회장님이 트럭에 실린 긴 부직포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내며 반으로 자릅니다. 반으로 갈린 부직포 양 끝단을 두 사람이 각각 잡고 밭 끝까지 끌고 간 뒤, 일렬로 늘어선 묘목들 주변을 완전히 가리도록 잘 싸매서 U자형 철심으로 고정시킵니다. 부직포가 자리를 잡으면 가장자리 아래쪽 흙을 군데군데 삽으로 퍼 올려 그 무게로 1차 고정을 하고, 이제 그 옆을 관리기로 밀며 지나가면 갈린 흙이 부직포 끝단을 덮어 예쁘게 마무리됩니다. 취재를 갈 때마다 종종 목격한, 깔끔하게 정리된 밭의 풍경들이 바로 이런 작업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었군요. 농기계를 겉핥기로 배울 때 말로만 들었던 관리기의 기능도 실감하는 순간입니다.

이날 못자리와 대추나무 밭 가꾸기 농활에서 가장 크게 와 닿았던 사실은 농촌 인력의 부재였습니다. 효심 넘치는 자식과 며느리, 사위를 둔 덕에 적어도 큼직한 순간에는 가족력으로 농사를 치러낼 수 있지만, 한편으론 그럴 수 없는 순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겨내야 할 고단함도 비로소 와 닿습니다. 육묘장에서도 들었지만, 하물며 도와줄 자식들이 없는 농민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테죠. 비록 과정은 간소화됐고 한창 시절에 비하면 규모도 줄었지만, 여전히 이렇게 온 가족이 모여 농사를 치러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노년의 부부에게는 큰 축복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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