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밤섬 배 목수② 연평도 조깃배가 마포나루에 들어오면

  • 입력 2020.04.1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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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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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섬은, 엄밀히 말하면, 본시 섬이 아니었다. 밤섬의 한 쪽 면이 육지인 영등포와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에 돌출한 이 밤섬 포구는 마포나루를 드나들던 어선이나 상선들이 거쳐 가던 주요한 길목이었다.

밤섬포구와 마포나루는 지척 간이었는데, 양쪽을 오가는 나룻배가 따로 있었다. 우리에게 밤섬의 이모저모를 증언해줄 배(船) 목수 이봉수 씨는, 1920년대에 당시의 화폐로 10환을 나룻배의 선가로 받았다고 증언한다. 20년대 중반 무렵까지만 해도 밤섬에는 200여 호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랬는데 1925년 여름, 임진강과 한강유역에는 500밀리미터에 육박하는 폭우가 쏟아졌다. 영등포와 용산의 제방이 무너지는 대재난이 닥쳤다. 전국적으로 650여 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그 해가 을축년(乙丑年)이었으므로 역사에서는 이 재난을 ‘을축년 대홍수’라 기록하고 있다. 그때 밤섬 역시 홍수에 휩쓸려서, 가구 수가 80여 호로 줄어들었다.

밤섬포구에서 나룻배 선주가 주민들에게 승선을 재촉한다.

-자, 마포나루 갈 사람 빨리빨리 타세요! 할머니도 배 타실 거요?

-오늘 마포에 조깃배 들어왔다던가?

-예, 조깃배가 서른 척도 넘게 들어왔어요. 조기 사러 갈 거면 빨리 타세요!

-아녀. 난 새우젓 사러 갈 것이여!

-조기를 사든 새우젓을 사든 얼른 타세요. 뱃삯 안 낸 사람들은 빨리빨리 10환씩 내요!

“조기잡이 어부들이 연평 바다에서 돛단배로 한강을 거쳐 마포까지 오려면 꼬박 서른 시간이 걸렸어요. 물때를 잘 맞춰야 그렇고, 도중에 썰물 때를 만나면 마포나루에 밀물이 들어찰 때까지 한강 하류에서 일단 기다려야 해요. 그렇게 대기하던 수십 척의 배들이 일제히 마포나루를 향해 항해하는 모습을 바로보고 있으면 가히 장관이었지요. 물론 1920년대에는 돛단배 말고 통통배도 무리에 더러 섞여 있었어요.”

이봉수 씨의 증언이다.

연평도 조깃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마포나루 어시장에 단연 활기가 돈다. 선주로부터 조기를 위탁 받아 매매를 거간하는 객주와, 그 조기를 떼어다 팔려는 소매상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지는데, 조기나 고등어를 세는 단위는 ‘손’이다.

-연평도 조기가 오늘 막 들어왔습니다. 조기 사세요! 거기 몇 손 달라고 그랬어요? 백 손? 잠깐만 기다리세요. 자, 조기가 한 손이요, 두 손이요, 세 손이면, 네 손이로구나….

“양손에 조기를 각각 한 마리씩 집어서 동시에 옮기면서 한 손, 두 손, 세 손…이렇게 헤아리다가 열 손, 즉 스무 마리가 되면 세어놓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옆에다 조기 한 마리를 따로 두어서 표시를 해요. 그런 다음에 다시 한 손, 두 손, 이렇게 헤아리고.”

따로 둔 조기가 열 마리가 되면 100손, 즉 200마리다. 수학으로 따지자면 20진법을 활용하는 셈이다.

조깃배가 들어오는 그 시기에, 새우잡이 배는 반대로 마포나루에서 본격적인 출어를 시작한다. 새우잡이 배 한 척이 출어할 때 보통은 염창동의 옹기 굽는 가마에서 새우젓 독(항아리) 사오백 개를 가져다 싣고서 서해 바다로 나간다. 어부들이 잡은 새우는 충청도 서산 일대의 동굴에서 발효된 다음, 7월경에 마포나루로 운반되어 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어시장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던 1920~40년대의 마포나루의 풍경이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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