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풀매기는 처음이지?

[ 한국농정신문 창간 20주년 기획 ] - 충북 진천 관지미의 1년 #18

  • 입력 2020.04.12 18:00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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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밭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 박순자 할머니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따님에게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 옆으로 이어지는 푸르스름한 부분이 오늘 풀을 매야할 둔덕입니다.
밭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 박순자 할머니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따님에게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 옆으로 이어지는 푸르스름한 부분이 오늘 풀을 매야할 둔덕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날, 도시는 점점 팽창하고 농촌은 몰락해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국농정>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려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30년을 도시에서만 자란 청년이 1년 동안 한 농촌마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공유하며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자 합니다.

두말할 필요 없는 농번기입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이 시기 농촌에서는 일하러 온 사람이 제일 반가울 텐데요. 농번기를 맞아 농업노동을 본격 체험해본다는 계획은 아쉽게도 코로나19 때문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레, 짧게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봅니다.

 지난 번 짧게 전한 소식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제 본격적인 농번기가 시작됐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취재로 관지미를 들어갈 날도 이제 딱 세 달, 기사 수로는 여섯 번 정도 남았는데요, 본래는 이즈음부터 해서 관지미를 가게 되는 주엔 아예 마을회관에 자리를 잡고 며칠씩 머물며 마을에서 지내볼 작정이었습니다.

필요와 욕구, 이유를 종합해 내린 결정이었는데, 일단 제가 낼 수 있는 최대의 노동력을 제공하며 농촌에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맨 처음에 만났던 농활대의 학생들을 떠올려보면,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그래, 이번 편 주제는 그거야!’하고 마음먹은 뒤 관지미에 내려오는 것만으로는 별 소득이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한철, 길게는 1년을 잡고 하는 농사일을 직접 겪어보는 것인데 단 하루에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리 없겠지요(그래서 과거 우리 신문에 존재했던 <기자농활> 코너가 없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떠올려 봅니다). 게다가 진천이 가까운 편이라곤 해도 오가는 데 넉넉잡아 매번 네 시간은 잡아야하니, 시시각각 생기는 주민들의 일감에 민첩한 대응을 하기 위해서도 상주는 불가피하다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론 농촌에서 잠들고 일어나며 24시간, 48시간을 생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었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코로나19 피해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의 일환으로 정부와 지자체는 각지의 공공시설을 닫았고, 이에 따라 농촌의 마을회관들도 폐쇄된 상태입니다. 관지미는 불과 열 가구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이곳 어르신들도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며 지난 3월 초 이후 회관에 발길을 끊고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철석 같이 믿고 있던 제 임시거처는 사라진 셈이지요. 애초 회관이 폐쇄되지 않았어도 코로나 확산 방지에 동참하자면 오래 머물며 마을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은 불가능 했겠지만 말입니다.

사정이 이렇지만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제 근본은 회사에 딸린 직장인인 만큼 부여된 취재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예정대로 진행이 안 되고 있긴 하지만, 관찰 위주로 단 하루씩이라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도울 주인공은 박순자 할머니가 됐습니다.

마을 중앙으로 난 큰 진입로 대신, 서쪽의 샛길을 통해 마을로 진입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유주영 이장님의 밭입니다. 그 옆에 박 할머니의 밭도 붙어있습니다. 이장님의 밭에 비하면 매우 작은데, 지도에서 보면 그 크기는 약 200평에서 250평정도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5편 ‘홀로 남은 할머니, 텃밭으로’에서 할머니의 주된 일터로 등장했던 바로 그 온갖 작물이 섞여 자라는 텃밭이 되겠습니다.

마을에 들어서자, 이날도 할머니는 오전부터 정신지체로 몸이 불편한 딸과 함께 밭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쭈그려 앉아 일하는 할머니 곁으로 가 인사하니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받아주십니다. 그저 “왔냐”는 질문 한 마디일 뿐이지만, 할머니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하는 지금은 할머니 나름대로 매우 반가운 기색을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밭은 가을, 그리고 겨울에 봤던 모습과는 딴 판이었는데요. 헌 이불까지 동원했던 멀칭(주로 비닐이 쓰이는데, 심어둔 농작물 근처의 흙을 감싸 덮어두는 것)이나 고춧대 등 다양한 작물이 풍성하게 자랐던 흔적은 오간 데 없고 텅 빈 땅만 남아있었습니다. 2주 전에 잠시 들렀을 때만 해도 수확을 마친 뒤 남겨둔 농자재들이 그대로 있었는데 그새 다 치우신 모양입니다.

쭈그려 앉아 뭘 하고 계시나 보았더니, 무언가를 심는 것이 아니라 심을 땅을 만드는 중이셨습니다. 옥수수를 심을 거라고 하는 둔덕 한 줄은 작년 늦가을 고구마를 수확한 뒤 내내 비어있었고, 이후 지금까지 자란 온갖 종류의 풀로 뒤덮여있었죠. 그동안 제가 해본 농사일이라곤, 앞서 언급한 <기자농활> 코너를 하느라 체험했던 ‘봄동·배추 수확’과 ‘수확 앞둔 사과의 종이봉투 제거’ 정도가 있었는데요, 관지미 취재를 시작할 때 농활대를 따라다니며 콩을 조금 심어본 것도 있네요. 하찮은 경력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이번 일은 그 말로만 듣던 ‘풀매기’가 된 것 같습니다.

제초는 그야말로 농사일에 있어 꽃이자, 필연적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 사는 친구들은 흔히 ‘농약’의 존재는 알지만서도 사실 그걸 왜 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요, 농민들은 당연 그놈의 지긋지긋한 잡초 때문이라고 입을 모을 것입니다. 보통 대부분의 작업이 기계로 이뤄지는 논농사의 경우 제초도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인데요. 논두렁을 제외하고는 보통 등에 살포기를 매고 농약을 뿌리거나, 아예 드론이나 소형 헬리콥터를 이용해 항공방제로 편리하게 해결하는데, 밭농사에선 제초제나 예초기, 관리기 등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직접 낫을 들 수밖에 없는 조건도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하물며 여기서는, 70 중반이 넘은 할머니가 기계로 밭을 밀거나 예초기를 등에 매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요. 아마 농촌 할머니들이 붙잡고 있는 텃밭들 태반은 이렇게 전통적인 ‘풀매기’로 경작을 준비하고 있을 테죠.

사태 파악이 된 저는, 밭두렁에 있던 자루가 긴 호미를 들고 열심히 땅을 찍었습니다. 뿌리가 얇고 건드리기 좋게 얽혀 있어 그저 칼날로 걷어내기만 해도 제거되는 잡초가 있는가하면, 아주 깊게 뿌리가 박혀있어 강하게 몇 번을 찍어야 뽑아낼 수 있는 것들도 많았습니다. 작업의 형태가 정해지자 제초는 곧 속도를 내기 시작했는데, 제가 풀들을 토양과 분리해 대충 덩어리째 둔덕 옆 움푹한 곳으로 모아두면 할머니는 호미로 땅에 남은 것들을 정리하고, 따님은 모은 풀을 자루에 모아 담아 몇 미터 옆 산자락에 버리고 오는 식이 됐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찍었을까, 간만의 육체노동에 구부린 채 버텨야 하는 허리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알고 있었음에도 새삼 느끼는, 할머니를 비롯해 농민들은 평생 이런 고생을 하며 버텨왔구나 싶은 경외감과 한편으론 매일 불평불만을 하며 버티지만 사실 나는 얼마나 편하게 돈을 벌고 있는 건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잡념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가며 몸은 기계적으로 호미를 찍습니다. 할머니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는 절대 먼저 쉬지 말아야 할 것만 같습니다.

“마을회관에 사람 없었지? 요새 밥을 못 했어….”

밥을 먹을 때를 한참 넘겨서야 옥수수 파종 준비 작업은 끝이 났습니다. 할머니의 고마워하는 얼굴은 금방 어두워졌습니다. 회관을 쓰지 않는다고 듣기는 했는데, 점심시간 무렵에 노인회장님 차가 옆을 지나가는 걸 보니 확실히 마을의 ‘점심모임’도 사라지긴 했나봅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배우자나 부양 자식 없이 버티고 계신 할머니기에, 혼자 점심을 해결해야 하는 나날이 길어지고 있는 상황이 특히나 괴롭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할머니를 더 도와드려야겠다고 썼었는데, 오늘 점심 한 끼나마 시름을 덜어드리기 위해 냉큼 차로 모시고 이월면으로 가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일에 지친 농사꾼들이 이웃집에 잠시 둘러 앉아 대화의 시간을 가집니다. 장소 제공은 김관형씨(왼쪽), 최준식씨(빨간 모자) 부부.
어느 날 오후, 일에 지친 농사꾼들이 이웃집에 잠시 둘러 앉아 대화의 시간을 가집니다. 장소 제공은 김관형씨(왼쪽), 최준식씨(빨간 모자) 부부.

마을로 돌아와 저희 셋, 그리고 마을 뒷산에서 엄나무 순을 캐고 돌아온 유주영 이장님과 남편 김기형씨는 김관형·최준식씨 부부 댁에서 잠시 담소의 시간을 나눴습니다. 마을길을 지나다 마침 마당 텃밭에 쌈채소를 심은 뒤 볕을 쬐고 있던 부부 옆으로 하나둘 모여든 격인데 이런 것도 농촌살이의 재미라면 재미라 할 수 있겠지요. 정이 넘치는 부부는 손님들을 위해 커피와 떡을 내왔고, 이장님 부부는 그 귀하다는 엄나무 순(외지 사람들이 늘 몰래 따가서 정작 마을 사람들은 못 먹은 지가 몇 년째 됐다고 합니다)을 한사코 나눠줍니다. 그리고 할머니 입장에서는, 여기서 이장님 부부를 만난 게 공교롭게도 나름 또 기회가 됐습니다.

“할머니, 얼른 말해요. 갈아줄 사람은 이 사람이여.”

몰랐는데, 할머니 밭의 절반 정도는 트랙터로 갈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트랙터를 몰 수 없기에 늘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야 하죠. 연재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할머니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쉽게 부탁하지 못하는 성격인데, 심지어 제게도 여전히 편히 말씀을 하시지 못하고 ‘요’를 붙일 정도니까요. 그나마 덜 어려운 이장님께 부탁을 해두긴 했는데 어쨌든 트랙터를 타는 사람은 남편 김씨라서, 떠밀려서나마 확실히 말을 할 기회가 생긴 셈입니다. 글을 쓰는 지금쯤 트랙터로 밭을 갈아주는 김씨를 보며 고마워 안절부절할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해 마음이 짠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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