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95] 이 동네 터줏대감

  • 입력 2020.04.05 18:00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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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며칠 전 크로바 씨앗 파종을 끝으로 한 달여 동안 지속된 과수원 리모델링 작업이 일단 마무리 됐다. 그래서 그날은 오후 3시반경에 일을 마치고 농장을 떠나려 하는데, 강선리 아랫동네 사시면서 고추·들깨 농사를 매년 이곳에 올라와 지으시는 70대의 농민 내외분께서 “퇴근 하시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이 동네 터줏대감이 벌써 퇴근하면 되느냐”하며 웃으셨다. 지나가는 인사말이었지만 터줏대감이라는 표현에 나는 순간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양양로뎀농원은 윗골이라 불리는 작은 야산 골짜기에 있는데, 먼 옛날에는 강선리 주민들이 이곳에서 취락을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주민들은 살기에 편한 아랫동네 평지, 지금의 강선리에 내려가 정착하게 됐다. 현재 윗골에 농가주택은 없으나 농막이 4채 정도 있고, 아랫마을 농민 두세 분께서 땅주인이 농사짓지 않는 밭에 주로 고추나 들깨 등을 매년 경작하고 있다. 강선리의 농민 두세 분도 자기 땅에서 엄나무·호두나무·고추 등을 경작하고 있다.

이곳 윗골의 농지는 전부 밭이나 과수원인데 그 규모가 대부분 몇백평에 불과한 매우 소규모 필지로 구성돼 있다. 그러다 보니 이 골짜기의 농경지 중 절반 정도는 지적도 상 ‘전’으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거의 산지화 돼 있어 농사지을 만한 땅이 아니다.

이 작은 농장은 나의 일터요, 삶의 자리이다. 영농기에는 거의 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다. 강선리에 있는 집에서 걸으면 10분, 차로 2분 걸리는 곳이니 집과 거의 붙어 있다. 농장에는 호텔급(?) 농막이 있는데, 낮에는 농사일 하다가, 쉬기도 하고, 글도 쓰고, 커피도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작은 나만의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농사일이 있을 때만 윗골로 올라오시는 분들이 볼 땐, 나는 늘 이곳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이 동네 터줏대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지난 5년여 동안 한 번도 내가 터줏대감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실상 전혀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터줏대감이라고 농담을 던졌지만 마땅히 할 말이 생각 안 나 그냥 ‘먼저 퇴근합니다’하고는 내려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바로 저분들이야말로 이 골짜기 윗골과 강선리와 우리 농촌의 터줏대감이 아닐까. 나고 자라 수십 년간 이곳 농촌을 지키고 계셨던 분들이기 때문이다. 귀농·귀촌한 분들이 꼭 명심해 줬으면 하는 것이 바로 현장에서 평생을 바쳐 오신 분들이 바로 터줏대감이라는 사실이다. 몸은 이제 많이 늙고 병들었지만 저들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귀농이든 귀촌이든 할 수 없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의 농촌엔 귀농·귀촌한 분들이 많이 계신다. 그러나 이들과 현지 주민들이 잘 융화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측면이 서로에게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귀농·귀촌인은 현지 주민들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어울릴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 하더라도 늘 마음속에 이들을 좋은 의미의 터줏대감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자연과 농촌이 좋아 귀농·귀촌했다 하더라도 인적이 아예 없는 허허벌판으로 올 수는 없지 않을까. TV에 나오는 ‘자연인'이 아닌 한 인간은 본래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 아닌가. 터줏대감인 주민들이 안계셨다면 이미 오래전에 피폐화 됐을 농촌지역으로 우리가 귀농·귀촌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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