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중동 바람⑦ 무소식, 모래 폭풍보다 무서운…

  • 입력 2020.03.2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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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사우디아라비아 중부에 있는 ‘카미스’의 장교숙소 건설 현장. 누군가는 수평계로 수평을 잡고, 목수들은 콘크리트 타설을 위한 거푸집을 짜고, 다른 한쪽에서는 철근작업을 하는 등 건축물의 기초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갑자기 현장 소장이 메가폰을 켜더니 다급하게 소리친다.

-모든 인부들은 작업을 중지하고 신속하게 버스에 올라타라! 지금 서쪽에서 모래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빨리 움직여!

국내에서 민방공 훈련할 때에는 세월아 네월아 꾸무적대던 사람들이, 현장 소장의 입에서 ‘모래 폭풍’ 한 마디가 떨어지자, 불난 강변에 덴 소 날뛰듯 후다닥 인부 수송용 버스로 내달아 올라탄다. 금세 하늘은 부연 먼지로 뒤덮이고 이윽고 사풍(沙風)이 휘몰아친다. 모래 알갱이에다 작은 돌멩이까지 섞여서 차창에 타닥타닥 부딪친다.

-유리창 깨질 것 같아. 모두 버스바닥에 엎드려!

현지인들이 ‘할라스’라고 일컫는 이 모래 폭풍을 처음 경험한 신참 노동자들은 벌써 반쯤 얼이 나간 상태다, 사우디 건설현장 10년 경력을 자랑하는 김윤억 씨는 말한다.

“여름철에 자주 일어나는 현상인데, 베테랑 일꾼들도 ‘할라스 바람 온다’ 하면 겁을 낸다구요. 비행기 타고 엊그제 막 도착해서 처음 현장에 나온 신참들은 꼭 무슨 전쟁 만난 표정이에요. 그래서 하는 말이 있어요. ‘모래 한 말쯤은 먹어야 할라스에 적응이 된다’라는.”

그러니까 중동에 다녀온 사람들이 자신이 벌어온 돈을 일컬어서 “뙤약볕에 모래바람 맞으며 번 돈”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니다.

 

중동 건설현장에 기능공으로 파견되던 사람들의 나이는 보통 45세까지로 제한돼 있었으나, 30대가 가장 두터운 연령층을 이루고 있었다. 대개 아이 한두 명씩을 둔 젊은 남자들이었는데, 장기간 동안 처자식과 떨어져 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국으로부터 우편물 꾸러미가 도착하는 날이 가장 기쁜 날이다.

-우편물 전달하겠습니다. 조성식 씨, 마나님 편지 왔네요. 최종범 씨 댁에서 온 편지는 뭐가 들었는지 두툼하네요. 식구들 안부 목소리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같은데요. 유길남 씨…

우편물을 받은 인부들은 각기 제 자리로 돌아가서 식구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는다. 편지의 서두는 누구 할 것 없이 엇비슷하다. 옛 시절 초등학생이 ‘전방에 계신 국군장병 아저씨께…’ 운운했던 것처럼 ‘여보, 머나먼 이역 땅에서 오늘도 불볕더위를 무릅쓰고…’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이 모진 고생을 해서 부쳐준 돈을 차마 쓸 수가 없어서, 우리 가족 생활비는 내가 벌어 쓰자고 결심하고 지난달부터 식당일을 다니고 있으며…’ 이 대목에서 눈물바람을 한다.

그런데 혼자서 말없이 숙소의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충청도 충주가 고향인 박기출(가명)이라는 사람이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편지를 보내오던 부인으로부터 벌써 두 달째 소식이 감감하다.

“그럴 때 주임을 찾아와 상담을 하지요. 농번기라 바빠서 그러겠지 별일 있겠느냐, 이렇게 일단 안심을 시켜요. 하지만 당사자는 극도의 초조와 불안에 휩싸이게 돼요. 고국에 있는 아내에 대해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 챈 인부들을 보면,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현장에 나가도 일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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