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아이들 소리가 들려요

  • 입력 2020.03.22 18:00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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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38가구가 사는 우리 마을에 단 한 명의 어린이인 은서는 책가방까지 사놓고 오매불망 입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체계적인 공적 사회에 편입하게 된다는 소속감이랄지, 젖내나는 유(乳)자를 떼고 배움길에 나서는 학생이 되는 경건함이랄지 아무튼 어린 마음이 일렁이겠지요. 그런 입학과 신학기 개학이 코로나19 사태로 전례 없이 미뤄지고 있으니 아이들도 어른들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학교가 배우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어린 학생들이 사회적 돌봄을 받는 공간이기도 하다 보니 이 갑작스런 사태에 대한 대처가 막막한 것이지요. 특히 맞벌이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젊은 부부들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닐 것입니다.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만한 데가 없으니까요. 이럴 때면 가장 만만한 곳이 아직 젊은 할머니 댁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은서뿐인 우리 마을에 난데없이 또랑또랑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골목을 휘젓고 다닙니다. 마늘논에서 풀맨다고 씨름하는 중에 우리 마을에서는 좀 해서 듣기 힘든 기운찬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을회관 폐쇄령 이후에도 어머니의 귀는 열려서 누구네 집에 손자들이 와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관심일 것입니다. 어쩌다 마주치는 마을 분들과의 얘기도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것이다 보니 이 단절의 시간에도 서로의 일상을 꿰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마을뿐만 아닙니다. 인근 마을에도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마을마다 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아이들이 출몰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노령화된 마을에서는 아예 접하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60대 중후반의 농민이 사는 곳이면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그렇지요, 개학과 입학이 미뤄지는 까닭에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외가나 친가에 맡겨진 것입니다. 농촌의 탄력적인 수용성이라고 할까요? 특별한 돌봄 시스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식의주 해결 외에는 자연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지요. 아직 아무것도 심어지지 않은 땅을 딛고 노는 일이며, 어른들을 돕는다며 서투른 솜씨를 발휘하는 일, 잠에서 깨어나는 개구리를 보며 놀라는 일, 시골표 치킨 맛도 비교해가며 또 다른 재미를 맛보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이들뿐만 아닙니다. 심신장애를 입은 이들도 농촌은 기꺼이 수용합니다. 도시에서는 수용시설에 있을 만한 장애인들이 농촌에서는 마을의 보살핌 속에 기꺼이 생활해내는 사례도 흔합니다. 실직하거나 은퇴한 이들도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며 머물 수 있는 곳도 농촌입니다.

이렇게 농촌사회의 수용성은 건강한 도시생활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아무리 행정체계가 우수하다해도 모든 사회를 다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고, 개별 모두에게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농촌은 충분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단순하게 먹거리 생산지로서의 농촌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루 8시간 노동’의 역사는 100년도 넘었습니다. 1880년대 미국의 노동조합과 무역연합회가 하루 8시간 노동규정을 결의했고, 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이 투쟁한 끝에 온 세계의 기준이 됐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이때 초기 노동운동을 튼튼하게 뒷받침해준 것이 바로 농촌의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법적인 기준도 없이 더 일하라고 요구하는 자본가에 맞서 싸울 때, 최후의 보루인 농촌이 ‘돌아갈 수 있던 곳’으로 여지가 있을 때라고 하지요.

돌아갈 곳이 있는 여유가 있는 자의 투쟁이 훨씬 가열찼을 것이고 그만큼 힘 있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이라고 전합니다. 초기 노동운동이 이룩한 성과가 지금의 노동현장에서도 가장 강력한 법적기준이 되는 것으로 보면, 8시간 근로제 쟁취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되뇌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19의 복잡한 상황에서 농촌 사회의 수용적 기능을 되짚어 봅니다. 이 멋진 농촌사회도 붕괴돼 버리면 그 누구도 돌아올 수 없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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