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l 농업통상 최악의 굴욕, 2000년 한-중 마늘협상

[창간 20주년 특집] 20년 전 한국농업 그리고 오늘

  • 입력 2020.03.08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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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한국농정>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본지 2001년 4월 26일자 신문 1면에 게재된 제2차 한-중 마늘협상 관련 기사. 4월 21일 베이징 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중국에 사실상 백기투항하자 농업계에서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한승호 기자
본지 2001년 4월 26일자 신문 1면에 게재된 제2차 한-중 마늘협상 관련 기사. 4월 21일 베이징 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중국에 사실상 백기투항하자 농업계에서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한승호 기자

본지가 창간한 2000년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의 여파가 휘몰아치고 FTA라는 새로운 폭탄이 태동한 시기였다. 바야흐로 농산물 시장개방의 피해가 가속화되던 이 때, 우리 정부는 중국과의 무역협상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마늘농가 보호를 포기하는 ‘통한의 자살골’을 넣는다. 2000년 7월의 굴욕적인 1차협상은 본지 창간 이전이라 기록이 없지만, 2001년 4월 2차협상 당시의 정황이 4월 19일자 신문부터 약 두 달에 걸쳐 비중있게 실려 있다.

사건의 발단은 1993년 UR 협정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마늘 관세를 정하면서 냉장·건조마늘엔 360%의 고율 관세를 매겼지만 냉동·초산조제마늘엔 30%의 저율 관세를 매겼다. 관세를 낮추더라도 수입이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허점을 놓치지 않고 밀려들어온 중국산 냉동·초산조제마늘은 다진마늘과 마늘장아찌 등의 형태로 국산 마늘과 직접 경쟁하기 시작했다. 1995년 4,000톤에 불과했던 냉동·초산조제마늘 수입량은 1999년 2만8,000톤까지 늘어나며 국산마늘 폭락을 조장했다. 위기를 느낀 농업계는 정부에 문제를 제기했고, 정부는 그 타당성을 인정해 2000년 6월부터 3년간 30% 관세를 315%까지 높이는 ‘세이프가드’를 발동했다.

2001년 5월 10일자 만평. 국산 마늘을 공격하는 중국에 앞장서 길을 터주는 우리 정부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한승호 기자
2001년 5월 10일자 만평. 국산 마늘을 공격하는 중국에 앞장서 길을 터주는 우리 정부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한승호 기자

여기까지의 흐름은 그나마 정상적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세이프가드는 WTO 규정상 정당한 자국 보호장치로서 절대 무역보복의 빌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을 중단하며 즉각 보복조치에 나섰다.

보복 자체가 부당한데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터무니없는 보복이었지만 2000년 7월 31일 한-중 마늘협상에서 우리 정부는 무력하게 순응해버렸다. 우선 세이프가드 종료를 2003년 5월에서 2002년 12월로 앞당기고, 그 때까지 매년 3만톤 이상의 중국산 냉동·초산조제마늘을 저율로 들여오기로 한 것이다. 또한 훗날 밝혀진 바, 2003년 이후 세이프가드를 연장하지 않겠다는 이면합의가 포함돼 있어 사실상 국내 마늘농가를 포기해버린 협정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뒤인 2001년 4월, 중국은 또 한 번의 억지를 부린다. 위 협정에 따라 우리 정부는 2000년도 중국산 냉동·초산조제마늘 저율관세할당을 2만105톤 배정하고 이 중 1만1,000여톤의 정부 의무수입을 이행했다. 다만 중국 현지 마늘가격 폭등으로 나머지 1만톤가량의 민간수입이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 민간수입 미이행에 대한 책임을 우리 정부가 지라는 것이었다. 본지의 집중 보도가 시작된 건 이 2차협상 때부터였다.

무성의한 우리 정부의 협상 태도와 굴욕적인 결과에 전국의 농민들이 분노를 표했다. 의성·영천·고흥지역 농민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승호 기자
무성의한 우리 정부의 협상 태도와 굴욕적인 결과에 전국의 농민들이 분노를 표했다. 의성·영천·고흥지역 농민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승호 기자

보도기사들을 보면 당시 정황은 1차협상 때와 다르지 않다. 4월 21일 협상에서 우리 정부는 2000년도 민간수입 미이행량 전부를 떠안음은 물론, 2001년 3만3,700톤, 2002년 3만4,500톤의 저율관세할당량도 전량 수입을 보장하기로 하는 등 이렇다 할 싸움도 없이 중국에 백기투항했다. 외교통상 역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굴욕에 굴욕을 거듭한 협상이었다. 산업자원부 장관은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며 협상을 정당화해 뭇매를 맞기도 했다.

농민들의 분노도 기사에 잘 담겨있다. 의성·영천·고흥 등지의 농민들이 마늘밭을 갈아엎으며 투쟁을 전개했고 여타 주산지에서도 집회와 정치권 규탄이 줄을 이었다. 정부는 부족한 가격으로나마 국산마늘 희망물량 전량을 수매하고 중국산 수입물량은 전량 필리핀 등에 재수출키로 함으로써 상황을 무마코자 했다.

그러나 농식품부가 중국산 마늘을 수입하는 데 국내 농산물 가격안정을 위한 ‘농안기금’을 사용키로 해 논란은 한참동안 계속됐다. 정부 실책과 농가 희생을 수습하는 비용이 또다시 농민에게 전가된 꼴이었다.

주종환 당시 본지 발행인은 일본 협동조합신문에 한-중 마늘협상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기고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정부도 파, 생표고버섯, 왕골 등에 세이프가드를 발동해 중국과 무역마찰을 빚었다.
주종환 당시 본지 발행인은 일본 협동조합신문에 한-중 마늘협상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기고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정부도 파, 생표고버섯, 왕골 등에 세이프가드를 발동해 중국과 무역마찰을 빚었다. 한승호 기자

덧붙여 당시 농식품부뿐 아니라 산업자원부와 정보통신부가 3분의1씩 재원을 충당키로 했는데, 산자부와 정통부가 마늘 희생으로 이권을 지킨 휴대폰·폴리에틸렌 업계로부터 기금을 강탈하다시피 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2차협상으로 정부가 입은 손실은 훗날 129억원으로 집계됐다.

2000~2001년 한-중 마늘협상은 우리 정부의 무력과 무능, 농업홀대 기조가 빚어낸 흑역사다. 기껏 발동한 세이프가드가 무력화됐음은 물론, 세이프가드 재발동까지 불가능해지면서 국산 마늘은 중국산 공세에 영구히 알몸으로 노출돼버렸다. 마늘이 뚫리자 대체작목인 양파 재배도 포화됐다. 해마다 마늘-양파가 시소게임을 하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산 마늘 연평균 수입량은 5만7,000톤가량이며 이 중 냉동·초산조제마늘이 4만톤 이상이다. 극심한 폭락을 겪은 2019년 마늘 국내생산량은 평년대비 6만여톤, 전년대비 3만여톤 많았을 뿐이다. 20년 전 그 시절 한-중 마늘협상에 임한 우리 정부가 좀 더 똑똑했다면, 조금만 더 농업과 농민을 소중히 생각했다면 마늘·양파농가의 오늘과 내일은 훨씬 더 밝지 않았을까.

해가 갈수록 곤궁해지는 마늘·양파농가의 절박함은 최근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마늘협회·양파협회 조직을 가능케 만들었다. 두 신생 협회의 제1 투쟁과제는 두말할 것 없이 수입 저지에 있다. 정부가 농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수입 문제에 책임을 다해야 할 이유를 바로 이같은 농업통상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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