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마늘 의무자조금에 농민이 빠졌다?

가입은 농민이 받는데 자조금 운영주체는 농협?
농민들은 대혼란 … 농협은 희생 불가피
농식품부 시나리오 안에서 농민·농협만 고통

  • 입력 2020.03.01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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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잘 나가던 양파·마늘 의무자조금 준비가 격랑에 휩싸였다. 농민 주도적 성격의 자조금에 농협 조직이 관여하게 되는 기형적 구조가 포착됐기 때문이다. 농림축산식품부(장관 김현수)가 정확한 설명 없이 임의로 구조를 설계·진행한 데서 비롯된 문제다.

양파·마늘 의무자조금은 농민 주도형 수급정책 실현을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기구다. 이에 주체적 성격의 농민단체인 전국양파생산자협회·전국마늘생산자협회(협회)가 발족의 주체가 돼 전국의 농민들을 설득하고 가입신청을 받아왔다.

문제의 원흉은 가입신청서다. 원예자조금통합지원센터에서 제작한 양파·마늘 의무자조금 가입신청서 한 귀퉁이엔 한국양파산업연합회·한국마늘산업연합회(연합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즉, 의무자조금 가입 신청 농가는 협회가 아닌 연합회 소속이 되며 연합회 내에 의무자조금이 설립되는 구조다. 연합회는 농민이 아닌 지역농협과 유통인들의 조직이다.

이상한 신청서에도 불구하고 “협회가 주체가 된다”는 농식품부의 설명을 믿고 움직였던 협회 간부들은 관련법령과 타 자조금 사례 등을 검토하던 중 문제를 직시하고 대응에 나섰다. 협회 내부에선 ‘자조금 추진을 중단하자’는 논의까지 나올 정도로 심각한 분위기였다.

농식품부는 “계획했던 대로”라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애초부터 임의자조금단체인 연합회를 바탕으로 의무자조금을 출범할 셈이었고 연합회 정관을 개정해 협회-연합회를 합칠 계획이었으며, 지난해 9월 이미 협회·연합회와 합의했다는 주장이다.

지난달 26일 전국양파생산자협회·전국마늘생산자협회 간부들이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실에 모여 의무자조금 문제와 관련, 농민 자주성을 확보할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전국양파생산자협회·전국마늘생산자협회 간부들이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실에 모여 의무자조금 문제와 관련, 농민 자주성을 확보할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협회는 물론 연합회도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농식품부도 “제대로 결론을 짓고 가려 했다면 시일이 한도 끝도 없이 늦춰졌을 것”이라며 논의를 얼버무린 정황을 간접 시인했다. 즉, 농식품부가 신속한 정책성과를 위해 협회나 연합회에 정확한 설명 없이 자신들의 구상대로 일을 추진했고 그것이 뒤늦게 큰 혼란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협회 측은 “지난해 9월 이 문제를 인지했다면 처음부터 온전히 협회를 토대로 한 의무자조금을 설계했을 것”이라며 한탄했지만 이제 와서 판을 엎기란 불가능하다. 농가 가입절차가 벌써 상당히 진행된 상황(가입률 양파 18.7%·마늘 15.2%)에서 일을 원점으로 돌리면 지금껏 받은 가입신청서가 종잇조각이 됨과 동시에 추진 동력마저 크게 꺾이기 때문이다.

이에 협회는 울며 겨자먹기로 당초 농식품부의 구상대로 연합회의 정관을 개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골자는 ‘농협’과 ‘유통인’으로 돼 있는 연합회 구성원을 ‘농협’과 ‘농민’으로 재편하고 협회 회원을 연합회의 농민회원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회원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농민이 연합회 대의원을 장악하고 계획대로 자조금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다만 정관 개정이 뜻대로 된다 하더라도 순수한 농민 자주조직이었던 협회가 연합회로 편입되면 농협과 공생하는 구조가 되고, 연합회 전체가 자조금법의 적용을 받아 농식품부 장관의 손아귀에 놓이는 문제가 있다. 이에 협회는 의무자조금 사업을 위해 연합회에 참여하되 협회 조직을 별도로 유지해 정부와 자조금을 견제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선 매우 복잡한 이중구조로 조직을 운영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연합회의 정관이 순탄히 개정될 수 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다. 농식품부의 구상대로라면 연합회는 농민들이 의무자조금을 발족하는 데 디딤돌 역할만 제공하고 자기 조직을 포기해야 한다. 농식품부가 정책자금 등 보상책을 제시한다 해도 순순히 이에 따를지는 미지수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협회-농식품부 상황과 달리 농협 측은 “아직 연합회 정관 개정에 관해 농식품부로부터 어떤 이야기도 전해들은 바 없다”며 느긋한 분위기다.

농식품부의 눈 가리기 식 자조금 사업추진은 농민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으며 향후 농민-농협 간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비록 농식품부의 정책성과는 신속하게 나올 수 있을지라도 이를 위해 농민과 농협에게 큰 짐을 지워버린 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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