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시장 하역노조에 휘날린 ‘민주화 깃발’ … 그 운명은?

노조 지도부 전횡 맞서 ‘33년’만에 민주화 세력 등장
민주화 쟁취 코앞에 두고 ‘노조 해산’ 결정에 뒤통수
시장 관계자들 ‘강 건너 불 구경’ … 힘든 싸움 계속

  • 입력 2020.02.23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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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가락시장 하역노조인 서울가락항운노조(위원장 오연준)의 조합원들이 지도부의 비민주적 조합운영과 전횡에 항거하다 역풍을 맞았다. 30여년만에 간신히 들어올린 ‘민주화 깃발’을 지키기 위한 조합원들의 싸움이 고달픈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가락시장 하역노조원들은 가락시장에 출하된 농산물을 경매장에 하역하고 낙찰된 농산물을 중도매인 점포에 배송하는 역할을 한다. 업무 자체가 육체적으로 고된데다 하루 10~15시간씩 주 6일의 고강도 노동을 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4대보험이나 초과근무수당, 퇴직금 등은 다른 나라 얘기다. 하역노조는 가락시장 내 특정 사업장(도매법인)에서 노동하기 위해 단지 고용노동부의 허가를 얻은 조직이다. 도매법인과도, 시장 관리공사와도 노사 관계가 성립하지 않아「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 즉 노동자는 있는데 사용자는 없는 매우 특수한 경우다.

조합원은 평균 2,000만원의 ‘권리금’을 내고 노동 자격을 얻는다(초창기엔 조합 납부 식이었으나 인력이 순환되면서 현재는 개인 간 거래로 변질). 노조는 각 도매법인과 하역비를 협상해 도매법인으로부터 하역비를 일괄 지급받고, 조합비 3%를 제한 뒤 조합원들에게 임금을 균등배분한다. 조합원 월평균 임금은 330만~350만원이다.

서울가락항운노조 조합원들이 노조 민주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가 지도부의 ‘노조 해산’ 결정에 도리어 수세에 몰렸다. 사진은 가락시장 하역노조원들의 작업 모습. 한승호 기자
서울가락항운노조 조합원들이 노조 민주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가 지도부의 ‘노조 해산’ 결정에 도리어 수세에 몰렸다. 사진은 가락시장 하역노조원들의 작업 모습. 한승호 기자

문제는 이같은 구조에서 철저히 민주적이어야 할 하역노조가 기형적으로 운영돼왔다는 것이다. 가락시장엔 한국노총 산하 서울가락항운노조(중앙·동화청과), 서울경기항운노조(한국·대아청과, 농협가락공판장), 서울청과하역노조(서울청과) 등 3개의 하역노조가 있다. 노조위원장 선출은 서울청과노조가 조합원 직선제, 나머지 두 노조가 대의원 간선제를 택하고 있는데 문제가 불거진 건 가락항운노조의 간선제다.

「노동조합법」상 조합 대의원은 조합원의 직접·비밀·무기명투표로 선출해야 한다. 하지만 가락항운노조는 노조 집행부가 지명한 대의원 후보를 조합원들에게 동의받는 식으로 선출했으며 이 대의원들이 노조위원장 선출 등 조합의 대소사를 결정했다.

결과는 목불인견이다. 27년을 종신 집권한 초대 위원장이 사망하자 다시 제2대 오연준 위원장이 이번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7년을 장기집권했다. ‘가락항운노조 민주화를 위한 모임(민주화모임)’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조합비로 구입한 위원장 차량 ‘제네시스 G80’의 유지비만 2018년 기준 연 4,300만원이 책정돼 있으며 위원장 업무추진비가 5,700만원, 제접대비가 2,600만원에 달한다. 위원장 개인 기사와 업무불명 사무직을 비롯, 노조 간부 다수가 전·현직 집행부들의 친인척 등으로 채워져 일반조합원들과 동등한 급여를 챙겨갔다. 조합원들의 열악한 근무실태를 감안하면 착취에 가까운 행태다.

지난달 기준 가락항운노조 조합원 440여명 중 민주화모임 가담인원은 150여명이다. 민주화모임은 지난해 5월 청와대 국민청원을 시작으로 노조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지난해 말 민주화모임 측 일부 조합원에 징계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결국 지난달 30일 오 위원장이 위원장직 사퇴와 위원장 직선제 실행 내용을 담은 합의서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상황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조합 지도부는 지난 4일 돌연 ‘조합의 합병·분할 또는 해산에 관한 사항’을 안건으로 하는 임시대의원대회를 소집했다. 민주화모임은 지도부가 평소 친분이 있고 조직 규모가 있는 서울경기항운노조와 노조 합병을 추진해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다고 판단, 대의원대회 저지에 나섰다. 그런데 경비용역을 동원해 대의원대회를 강행한 지도부는 노조 ‘합병’이 아닌 ‘해산’을 결정해버렸다.

‘합병’과 ‘해산’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가락항운노조가 서경항운노조에 흡수합병되는 경우를 가정하면, 가락항운노조의 노조 민주화 시도는 물거품이 될지언정 조합원 전체의 소속은 고스란히 서경항운노조로 옮겨진다. 그러나 해산이 된 이상 조합원들은 개개인이 서경항운노조에 가입신청을 해야 하는데, 민주화모임의 존재는 서경항운노조에게도 분명 달가울 리 없다. 최악의 경우 일부 조합원들이 가입신청을 거절당한다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 것은 물론, 전술한 2,000만원의 ‘권리금’ 또한 허공으로 사라지게 된다. 민주화모임은 이 일련의 과정을 설계하는 데 서경항운노조와 도매법인, 도매법인의 모기업들까지 관여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민주화모임은 가락항운노조 해산 의결 직후 새로 ‘가락항운노조 사수 대책위원회’를 꾸려 대응 중이다. 가락항운노조 대의원들이「노동조합법」의 정당한 절차 없이 선출됐으므로 대의원대회의 해산 의결이 무효라는 주장이며, 이 내용으로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고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한 노조의 민주화 시도가 무참히 꺾일 위기에 놓인 사안이지만 시장 내의 반응은 냉랭하다. 조합 내부의 문제로 외부에서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도매법인들은 사무적인 관점에서 하역업무 정상가동만을 고민하고 있고 중도매인들은 발언을 아끼는 분위기다. 관리공사 또한 행정이 개입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다만 전근대적인 하역노조 시스템 전체를 「근로기준법」에 편입시킬 방안에 골몰하고 있다. 오히려 시장 밖에 있는 송파유니온과 민주노총·전국농민회총연맹, 민중당·정의당 등의 세력이 민주화모임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가락항운노조 해산의 분수령이 될 법원의 가처분 결정은 금주 중에 확정될 전망이다. 황병일 가락항운노조 사수 대책위원장은 “설령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 가락항운노조가 존속한다 하더라도 도매법인이 가락항운노조에 계속 일을 맡기리란 보장도 없다. 여러 모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고 연대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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