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92] 뭘 그렇게까지

  • 입력 2020.02.23 18:00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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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지난해 12월 초부터 올해 2월 중순까지 거의 두 달 반 동안 양양을 떠나있었다. 내게는 농한기이기도 했고 그동안 자주 가보지 못했던 객지에 사는 아이들 집에도 모처럼 장기간 가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추운 겨울을 잘 견디라고 농장의 물탱크와 동력분무기의 물기를 빼주는 등 월동준비도 잘 해 놓았다. 농막 안에 있는 작은 온수탱크가 얼지 않도록 조그만 전기온열기도 조금 틀어 놓았고, 농막으로 올라가는 지하수관이 얼지 않도록 열선을 감아 놓기도 했다.

예년 같으면 늦어도 2월 초부터는 정지·전정 작업을 시작했을 것이나, 수종갱신을 위해 지난해 말 알프스 오토메를 거의 베어버렸기 때문에 올해는 동계 전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됐다. 그래서 한겨울을 지나 2월 중순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나는 이번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기회로 유럽 선진국의 여러 도시와 주변 농촌지역을 조금 다녀보았다. 현대와 고대가 잘 어우러진 도시엔 녹지공간이 정갈했고, 잘 정돈된 도시외곽과 농촌지역엔 인간과 자연과 환경이 조화롭고 아름답게 조성돼 있었다. 솔직히 외형만으로도 보고 싶어지고 살고 싶어지는 곳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두 달 반이 지난 후 내 삶의 터전인 양양으로 다시 내려와 농장을 둘러보니 농막이나 농장시설들이 겨울을 잘 이겨낸 것 같았다. 농막 안에 들여놓았던 청호박과 맷돌호박에서 혹시나 벌레가 기어 나오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멀쩡했다.

사실 두 달 이상 집과 농장을 완전히 떠나있어 본 적은 귀농·귀촌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나는 두 달 반이라는 꽤 오랜 기간을 온전히 내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분주한 세월이었다.

길어야 한두 주 정도였지 이렇게 장기간 집과 일을 떠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은퇴 이후의 삶이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여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은퇴 이후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농촌으로 들어왔기에 가능한 여유와 한가로움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상당한 기간 동안 삶의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복귀했는데도, 변한 것 없는 소나무와 밭과 바다와 정겨운 동네마을과 좁은 안길 등 우리 마을의 농촌 풍광은 변함이 없다. 장관인 물치항의 해돋이는 오늘도 변함이 없고 멀리 보이는 설악산 대청봉에는 아직까지도 며칠 전 내린 하얀 눈이 솜이불처럼 덮여 있다. 너무나 아름답고 조용하고 고즈넉한 농촌 풍광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감상은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의 농촌 풍광에 비해 더욱 아름답고 잘 정돈돼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 내가 살아가야 할 동네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리라. 정겨움이란 이런 것일까.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물치 앞바다에서는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태양이 억겁을 저렇게 매일 떠오르는 볕 밝은 곳에서 인생 후반부를 나는 살고 있으니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다. 복잡하고 정돈되지 못한 시대를 사는 짧은 생명인 우리 인간들에게 자연은 과연 뭐라고 말할까. 얼마 살지도 못하면서 뭘 그렇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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