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춘녀씨의 2만평 고사리밭 농사기

  • 입력 2020.02.23 18:00
  • 수정 2020.02.24 09:05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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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농산물 가공법인 운영을 앞두고서 농업기술센터에서 법인설립 교육을 여러 날 동안 진행했습니다. 사실 법인이라는 것이 5인 이상 구성만 해놓고서는 운영은 개인이 알아서 하면서 형식적인 이사회 운영구조가 허다하니 설립에서부터 운영 전반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고자 여러 날의 교육과정을 잡았나봅니다.

그 과정에 자기소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꾀 많은 강사가 주문하기를, 자기소개를 하되 농사작목은 무엇이고 어떤 식의 농가공을 희망하며 얼마의 소득을 기대하는지를 중심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상대의 요구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중심으로 말하는 경우가 잦아 회의가 산으로 가는 것을 익히 봐왔으니 자기소개에서부터 훈련을 하자는 것이지요.

그런 강사의 주문에도 불구하고 교육생들은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말을 늘어놓거나 이름만 밝히고 들어가는 이도 있었으니 역시나 제대로 말하기에 대한 훈련은 평생 지속할 필요가 있다 싶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 춘녀씨, 나와 비슷한 연배의 젊은 여성농민입니다. 앞으로 나올 때부터 상냥함과 씩씩함을 달고 나와서는 고사리밭 2만평을 농사짓는다고 설명을 죽 하는데 나는 그만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있잖아’라고 친한 사람끼리 어떤 말을 강조할 때, 앞세우는 말이 있지요. 이곳에서는 그 말 대신, ‘안 있습니꺼?’라고 시작합니다. 춘녀씨는 말을 할 때 안 있습니꺼? 라고 하는 말버릇이 있나 봅니다.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긴장을 풀도록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춘녀씨가 평소에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때 자신을 낮추고 상대로 하여금 편하게 하도록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입말을 수십 명의 청중들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펼쳐내는 것은 당당함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의 방식대로 말하겠다는 것이지요. 그 자세도 청중의 눈과 귀를 모으는데 충분히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서 태어나 자라다가 농사가 싫어서 서울로 갔다고,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다시 여기로 왔다고, 농사가 죽도록 싫어서 바닷일을 했노라고, 그렇게 시작한 뱃일로 3년 만에 3,000만 원을 모았는데 친정아버님의 권유로 고사리밭 3,000평을 샀다고, 자가로 지을 수 있는 농사가 딱 3,000평인데 뱃일과 겹치다 보니 남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남의 손들이 고정적으로 매일 일할 수 있도록 해야지 며칠에 한 번씩만 오는 것은 할 수 없다 해서 다시 3,000평을 늘리고, 좋은 고사리가 있다고 소개해서 또 늘리고 한 것이 2만 평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아뿔싸, 고사리밭 2만 평. 한 손에 두 가지 일을 못 한다는 말을 할 때 흔히 쓰는 말이 한 손에 고사리 두 개 못 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고사리는 한 줄기씩 끊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이 일찍 새는 봄날에 이른 아침부터 오후가 다 되도록 허리를 완전히 숙여서 고사리를 꺾는 봄날의 그 노동은 차마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을 봄철 4개월 동안 지속하는 것이니 그 고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고사리값이 5년 전에 비교해 반 토막입니다. 제주나 남해가 주산지이던 고사리가 중부지방 골짝 논까지 점령했으니 값이 폭락한 것이지요. 그게 딱 춘녀씨의 농사량 확대와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젊은 농민들이 규모화 됐을 때는 이미 생산량이 정점이라 가격경쟁력이 바닥을 치기 딱 마련인 셈입니다.

춘녀씨에게 농사가 어떤 보람이 있냐고 살짝 물었습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내 말을 뭘로 들었냐고, 농사가 싫어서 도망갔다는 소리를 못 들었냐는 되물음을 합니다. 그런데도 무엇에도 밀리지 않는 당당함과 싱그러운 기운으로 봐서 농민으로서의 자부심을 최대한 갖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너끈하게 이겨내고서 기꺼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그 힘, 생명을 키우는 이에게만 허락된 강함이지요. 춘녀씨의 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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