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중동 바람② 사우디 파견 노동자, 시험 봐서 뽑았다

  • 입력 2020.02.23 18:00
  • 수정 2020.02.23 21:49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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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대대적인 중동 건설 붐이 일면서 노동자들이 대거 사우디 등의 현장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가고 싶다고 누구나 무차별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별다른 기술이 없어서 잡역부로 신청해서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정부분 기술을 습득한 기능공하고는 급여의 차이가 컸다.

가령 주택건설 현장만 해도 타일, 도장(페인트), 미장, 조적(組積, 벽돌 쌓기), 배관, 철근, 목공…등 다양한 분야의 기능을 갖춘 인력이 필요했고 또한 기업체마다 현장 사정에 따라서, 혹은 시기별로 분야별 선발인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한 중동 진출 건설업체에서 현장에 파견할 건설목공을 선발하는 시험장으로 가보자.

-다음, 264번 나오세요. 목수 경력이 8년이라고 했는데…저기 있는 나무를, 먹줄 따라서 톱으로 한 번 켜보세요.

호명을 당한 264번 남자가 호기롭게 나서서 톱질을 한다, 하지만 그의 톱질 궤적은 먹줄을 이리저리 비켜 지나간다. 그 곳에 모인 상당수의 응모자들이 그러하듯, 그가 지원서에 기재한 ‘목수 경력 8년’은 속된 말로 ‘뻥’일 가능성이 크다.

-쯧쯧쯧, 그런 엉터리 실력으로 무슨 목공일을 하겠다고…아니, 사우디에 무슨 개 집 지으러 가는 줄 알아요? 불합격!

“사우디 가겠다고 국내 건설현장에 찾아가서 두어 달 동안 노임 안 받고 ‘벼락공부’를 하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특히 건축현장에서만 통용되는 이른바 ‘노가다 용어’가 많거든요, 그거라도 익혀야 심사위원 앞에서 경력이 있다고 우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그 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 훤히 꿰뚫고 있었지요.”

1980년대 초에 한진건설의 협력업체 직원으로서 도장공, 즉 페인트공들을 이끌고 사우디에 다녀왔던 김윤억 씨의 증언이다. 건설회사에서 직접 기능공 양성소를 차려놓고 운영하면서 현장에서 필요한 인력을 훈련시켜 내보내는 업체도 있긴 했으나, 상당수의 기업들은 공사 분야별로 소규모 업체들에게 하청을 맡겼기 때문에, 실력 있는 기능공들 못지않게 편법으로 사우디 행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번에는 도장공을 선발하는 인천 부평의 페인트 실기 테스트 현장으로 가보자.

-잘 보세요. 저쪽에 동그라미하고 삼각형, 사각형이 그려져 있지요? 제한시간 내에 페인트 칠을 끝내야 하는데, 선 바깥으로 칠이 삐져나오면 감점입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코스로 여기 있는 창문틀을 칠하면 돼요. 자, 준비 됐으면 시이작!

심사위원이 호루라기를 분다. 응모자들이 페인트 통을 들고 달려 나가 붓질을 시작한다.

“시험에 합격해서 도장공으로 사우디 현장에 갔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대우를 받는 게 아니에요. 급여가 각각 달라요. 실기시험이 끝나면 개인기록카드에다 점수를 매기는데, 그 점수에 따라서 식읍 판정이 달라지거든요. 실기 테스트 점수가 65점~70점이면 초임 식읍이 45불~60불(일당)이었어요. 일반잡부는 35불 정도였고. 그래도 국내에서 받은 노임의 세 배 이상이나 됐지요.”

왕조시대에나 통용됐던 식읍(食邑)이라는 말이 나온다. 아, 사우디 가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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