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멀어져가는 무엇

  • 입력 2020.02.16 18:00
  • 기자명 최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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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외순(경남 거창)
최외순(경남 거창)

휘영청 밝고 둥근 보름달이 떴다. 대보름달이라 역시 크고 밝다. 대보름은 농촌에선 농사의 시작, 마을공동체에는 한 해 동안 몇 안 되는 큰 행사이다. 달집을 만들어 태우고, 지신밟기에 풍물소리까지 들리는, 그리고 마을에 설거지를 하러 가야 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살짝 들뜨기도 하는 등 대보름을 기다리는 감성은 여전하다.

풍물소리와 마을 어른들의 어깨춤을 지켜보다 흥에 겨워 얼렁뚱땅 어깨춤을 따라 해보기도 하고 달집태우기, 쥐불놀이에 대한 아득한 기억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빨갛게 달아오른 숯을 넣은 찌그러진 깡통을 손에 쥐고 싶었던 때였는데 기억 속에 돌려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떼는 써봤을 터.

한동안 잊고 있었던 대보름의 추억은 농촌으로 시집온 후 눈앞에서 재현됐는데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아직 달집을 태우는 풍습이 남아 있었고 마을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돼지도 잡고 음식도 만들고 나눠먹기도 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남편과 마을 청년회 회원들이 달집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하고, 대나무를 섞어 달집을 만드는 데 종일 매달려야 했고 그런 상황이 불만이기도 했지만 엉뚱하게도 달집을 만들었다는 남편이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매년 진행되는 대보름 행사도 어느 해 부터인가 조류독감, 신종플루, 구제역, 올해는 코로나19 등 여러 가지 일로 매년 못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러다 보니 달집을 못 본지도 몇 해가 된 듯하다. 올해 아홉 살 되는 셋째와 세 살 넷째는 달집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실제 못 봤다고 해야겠다.

대보름달이 비친 방 안에서 잠든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무엇인가 허전하고 허무하게 지나간다는 생각이 든다. 안전이 우선돼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줄 수 있는 무엇은 점점 단순해지고 좁아지고 있다. 여러 가지로.

생활과 먹을거리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은 바쁘고 농사를 짓는 농민도 바쁘다. 바쁜 일과 속에 먹거리는 대량 유통되거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찾게 된다. 공장에서 가공되는 것들에게 익숙하다. 마을이나 행사에는 ‘박ㅇㅇ, 비ㅇㅇㅇ’ 음료가 일상화돼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런 먹거리 재료는 대부분 우리 농민이 생산한 것도,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위생적이며 계량돼 있고, 일정한 맛이 나는 대부분의 먹거리는 기업식 제조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이런 구조가 합법적이고 현대화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느끼지 않을까. 무엇인가 단절되고 중요한 것이 소외돼 있다. 대보름날 오곡밥 도시락 체험과 부럼 깨물기 체험, 귀밝이술 시음을 로컬직매장에서 진행했다. 오곡밥 도시락은 손맛이 좋은 옥경 언니에게 부탁했고, 언니는 가마솥에 쪄서 오곡밥을 지었다.

정성이 담긴 오곡밥을 가정에서 맛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형태이다. 이런 계기를 만들기도 쉽지 않고 더구나 일반판매는 할 수 없다. 때문에 이런 소소한 체험이나 행사를 진행하며 맛을 경험하고 이어간다. 수확한 농산물을 조리해 밥상으로 이어지는 과정 대부분이 생략되고 단절되고 있는 현실 속 대안차원의 활동이다.

안전하지만 사육되는 가축처럼 단절되고 단조로운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면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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