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파사⑥ 전기다리미와 카세트라디오를 월부로 샀다

  • 입력 2020.02.0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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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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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가 윗녘 나들이를 해야 하는 날이면 엄니는 새벽부터 바빴다. 우선 아부지가 입고 나갈 두루마기며 저고리며 한복바지를 내어다 마당의 빨랫줄에 걸었다. 그러고는 아궁이에서 숯불을 피워 다리미에 담았다.

이윽고 엄니는 촉촉하게 이슬을 맞은 두루마기 등속을 걷어 마루로 가지고 와서는, 아직 단잠에 빠져있는 나를 불러 깨웠다. 맏이였으니까.

“얼릉 일어나라. 느그 아부지 옷 좀 같이 대리자!”

툴툴거리며 이불속을 빠져나온 나는 마루로 나와서 다리미를 든 엄니와 마주 앉았다. 두 손으로 두루마기 자락을 팽팽하게 당겨 잡아야 했다. 엄니는 왼손으로는 옷깃을 당겨 잡고, 오른손에 숯불 다리미를 들고서 밀고 당기고 하며 다림질을 했다. 어쩌다 내가 맹렬하게 달라붙는 졸음기를 털어내지 못하여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치기라도 하면 아차, 하는 순간에 다리미의 숯불덩이가 옷 위로 쏟아지기도 했다. 기억하기에 내가 그런 실수를 서너 차례 해서 심한 지청구를 듣기는 했으나, 옷자락을 낚아채는 엄니의 동작이 워낙 번개 같았으므로 옷을 태워먹은 적은 없었다. 옛 시절엔 그렇게 옷을 다렸다.

그러다 숯불이 필요 없는 다리미가 나왔다.

-다리미 사세요. 다리미가 왔습니다. 전기다리미를 월부로 팝니다!

다른 가전제품과 마찬가지로 다리미 역시 외판원들이 짊어지고 다니면서 보통 10개월 할부로 판매를 했다. 그런데 당시의 다리미는 온도를 자동으로 조절해 주는 기능이 없었으므로 열선이 끊어져서 고장을 일으키는 일이 잦았다. 왕년의 전파사 주인 이해중 씨는 말한다.

“다리미의 구조가 운모판에다 열선을 배치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런데 가열상태로 오래 있으면 그 열선이 잘 끊어져요. 그 땐 외판원들이 모두 기술자들이었지요. 애프터서비스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월부금 수금하러 갔다가 열선 운모판을 바꿔주고 돈을 따로 받았어요.”

하지만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걸친 기간에 가장 각광을 받았던 히트 가전제품은 뭐니 뭐니 해도 대형 카세트라디오였다.

외판원들은 그 대형 카세트라디오를 너덧 개는 등에다 꾸려 지고 하나는 손에 들고서, 음악 소리를 쿵쿵 울리면서 주택가 골목을 돌아다녔다. 크기가 압도적이었을 뿐 아니라 양쪽에 스피커가 둘씩이나 달려 있어서, 이동식 전축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따위의 노래가 입체음향으로 쿵쿵쿵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외판원을 일삼아 따라가며 들었을 정도로 대형 카세트라디오의 위용은 매우 선동적이었다.

더구나 그 카세트라디오는 마이크를 꽂아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유독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야외 오락용으로 그만이었다.

구로공단이나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이 어쩌다 휴일을 맞아서 삼삼오오 야외로 놀러 갈 때에도 누군가는 그 대형 카세트라디오를 반드시 챙겼다. 중‧고등학생들의 소풍 나들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1970년대에 불어 닥친 고고 춤 열풍은 카세트라디오의 인기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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