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행복하시나요?

  • 입력 2020.02.02 18:00
  • 기자명 심문희(전남 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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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내 나이 쉰셋의 설은 태어나 처음으로 차례상 없는 설이었다.

어릴 적 종갓집이었던 우리집은 일 년 열두 달 제사가 없는 달이 없었다. 없는 살림에 배를 곯던 날이 허다했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제삿날이나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몇 해 이후 맏며느리인 엄마는 제사를 하나로 줄이겠다고 선언하셨다.

작은아버지와 고모님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제사상을 준비해야 하는 이의 선언을 누구도 막지 못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도 지금까지 엄마는 며느리가 없는 덕에 혼자서 제사와 명절 차례상을 차리신다.

신혼 초, 넷째 아들인 시아버지의 세 번째 아들 남편, 명절이나 제사 때 아버님 따라 큰댁으로 갔다. 큰집 큰어머니가 어떻게 준비했는지 모른 채 숟가락 하나 달랑 얹어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 제사와 명절을 보냈다. ‘장남이 아니어서 좋다’ 하셨던 엄마 말의 의미를 알게 됐다. 하지만 시댁에서 함께 살았기에 차례상만 없지 멀리서 올 남편의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해야 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제사와 차례가 시작됐다. 아들이 셋이나 되니 며느리도 셋, 덕분에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일은 한결 쉽게 할 수 있었지만 앞뒤로 사흘이 휴일로 주어지는 명절을 고스란히 만들고 먹고 치우고 부엌을 벗어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설거지를 같이 해야 한다거나 도와 달라는 말은 시어머니와 큰 시숙에겐 금지된 단어였다. 행여 누군가 함께 하면 거북한 분위기에 기분이 심하게 상했다는 표정을 역력히 표현하신다. 어차피 해야 할 일, 일 년에 보면 얼마나 본다고 얼굴을 붉혀야 하나 슬그머니 남편도 뒤편으로 나앉거나 그동안 못 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버리곤 했다.

‘성평등한 명절 보내기’ 캠페인이 사회 여기저기 이야기되고 있지만 농촌에서는 여전히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의 쉼 없는 노동은 역할이 고정돼 버린 듯하다. 일 년에 단 몇 번이라도 덕분에 만날 수 있는 자리, 이렇게라도 계속 봐야 할 관계라면, 그 만남에서 누군가 고통을 참아야 하는 자리라면 바꿔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불편한 진실을 수면 밑에 그대로 두고 끊임없이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 것이라 믿는가?

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신 관계로 이번 설 차례를 지내지 말자는 장남의 결심 덕에 처음으로 차례상 없는 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지 않아도 되는 설을 보냈다. 차례를 지내지 않아 몸이 편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아쉽고 섭섭한 마음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민족의 명절인 설! 세뱃돈을 받을 마음에 한껏 들떴었던 어릴 적의 나 그리고 나의 아이들! 모두가 행복한 설과 그 추억을 내 대에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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